산행후기

Ship's Prow Summit (2022년 3월 12일)

진승할배 2022. 3. 21. 05:49

헐~ 지금까지 내가 올라간 산은 산도 아니다.
지난번 산행 후 새 스팻츠가 필요해져서 장비점에 갔다가 마침 록키어(Rockier)들의 교과서라고 불린다는 알란 케인(Allan Kane)의 가이드북이 계산대 옆에 보이길래 한 권 들고 나왔다. 

책 제목은 'Scrambles in The Canadian Rockies' 처음 록키에서 산행을 시작할 때 이 가이드북을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책방에 서서 이 책을 들춰 보았을 때 도저히 내가 올라갈만한 산이 없을 거 같아서 좀 더 쉬운 트레일 위주로 된 Gillian Daffern의 가이드북을 들고 나왔었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알란의 가이드북은 바윗길을 엉금엉금 기어야하는 Scramble 코스들만을 소개한 책인데 알란은 그 산들을 easy, moderate difficult, difficult로 구분을 해 놓았다. 책을 사고 며칠 연구해 보니 당연히 지금까지 내가 올라갔던 산들은 대부분이 easy 거나 아예 수록 조차도 되어있지 않은 산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몇 개의 산은 moderate에 속한 산행을 했는데 Big Sister와 Cascade 등이다. 또 예외적으로 Difficult에 속한 산도 두 개가 있었는데 Lady MacDonald와 The Wedge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 두 개의 산에 갔을 때 동반자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Ridge Walking은 하지를 않아서 정작 Difficult 한 구간은 피한 쉬운 산행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보면서 difficult란 단어에 내가 아는 '어려운'이란 뜻 외에 혹시나 '위험한' (dangerous)이란 뜻이 있는 건 아닌가 사전을 찾아봤다. 왜냐하면 알란이 구분해 놓은 difficult가 내가 생각하는 difficult와 다른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산을 구분할 때(물론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별도로 하고) difficult의 산행이라면 말 뜻 그대로 아주 가파른 언덕에 스크리 지역이 있는 3,000m급 산을 1,500m 이상 올라야 하는, 전체 산행 시간이 10시간 이상 걸리는 힘든 산행을 difficult 하다고 생각한다. 또 moderate라고 하면 2,800m 전후 높이에 약 1,200m쯤 오르는 8시간 전후의 산행을, easy는 2,600m 이하 약 6시간 전후의 산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란은 6시간 전후의 짧은 산행도 아주 위험한 구간이 있으면 difficult로 구분을 해 놓았고, 3,000m가 넘는 아주 가파른 언덕을 11시간에서 12시간 산행하는 산도 위험한 구간이 전혀 없으면 easy로 구분해 놓았다. 나에겐 조금 위험한 것 보다 체력적으로 힘든 게 더 어려운 산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하고 difficult 한 산행의 개념이 다른듯하다. 

스크램블(Scramble) 산행은 사전 뜻 풀이 그대로 바위가 있는 구간을 손과 발을 이용해 기어오르는 산행이다. 다만 암벽 등반하고 다른 점은 암벽등반에서는 하네스(harness)를 착용하고 자일을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암벽등반은 클라이밍(Climbing)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대략 산행의 힘든 정도에 따라 트래킹(Tracking), 하이킹(Hiking), 클라이밍(Climbing)으로 나뉘는 것 같은데 스크램블링(Scrambling ; 이런 말이 있다면)은 하이킹과 클라이밍의 중간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또 암벽등반과 스크램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암벽등반은 등반구간이 자일 한동 길이(약 30-40m)의 피치(Pitch)로 나누어져 있어서 그 피치를 등반하는 동안에는 쉴 수가 없다. 아니 쉴 수 있는 지점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러니까 피치 안에서는 죽기 살기로 올라가야 한다. 암벽등반은 어려운 정도에 따라 극한의 발랜스를 요구하기도 하고 거기에 더해 힘과 지구력을 요구하지만 스크램블은 그런 기술적이나 체력적인걸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자일을 사용하지 않으니 피치의 개념이 없고 자기가 힘들다고 느낄 때는 아무 때나 쉴 수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암벽등반 시에는 피치 중간에서 밸런스가 깨지거나 힘이 떨어지면 늘 추락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하네스에 자일을 연결해 빌레이(Belay)라고 부르는 확보를 한다. 하지만 스크램블은 그런 확보 장치가 없다.
스크램블도 좌우가 낭떨어지인 바윗길을 등반하는 거니까 늘 추락의 위험은 상존한다. 전에 복수형도 말했지만 그런 이유로 생릿지가 암벽등반 보다 어쩌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이유이다. 암벽등반은 추락해도 자일이 잡아주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록키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어 이제부턴 조금 업그레이드된 산행을 해볼까 해서 알란의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캔모어로 산행을 나설 때마다 캔모어 시내 뒷산인 마운트 로렌스 그라시 산을 보면서 그 산군 맨 왼쪽에 있는 산 이름이 무얼까 늘 궁금했었다. 로렌스 그라시 산의 오른쪽으로 있는 봉우리들은 매너픽과 하링픽으로 각각 다 이름이 있다. 그런데 하링픽 보다 절대 낮을 것 같지 않은 산에 이름이 없다는 게 의아했다. 물론 구글맵에도 이름이 안 나온다. 그래서 그냥 로렌스 그라시 산의 제2봉쯤 되나 보다 생각했었다.
지난주 유튜브로 겨울 산행을 검색하다 올해 2월 12일 산행 동영상이 올려져 있길래 봤더니 바로 이 산이었다. 이름하야 Ship's Prow Summit. 물론 공식 명칭은 아니다. Prow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물'. 그러니까 '뱃머리 정상'이란 이름이다. 헌데 동영상을 봐서는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 전에 피존 마운틴 갔을 때 이 산을 찍은 사진이 있을 거 같아 찾아보니 과연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었다.(사진 참조) 

모처럼 캔모어로 산행을 나섰다. 지난번 피존 마운틴 갔을 때 니클까지 긁어 모아 불쌍한 모드로 동전으로 계산했던 주유소에서 보란듯이 카드로 탭(Tap)하여 결재했다.(에구 참 못났다. 누가 알거라고... ㅋ)(참! 한국에도 이런 Tap 카드 결제 방식이 있을 건데 한국말로는 뭐라고 부르는지 궁금하다. 여기처럼 그냥 영어로 Tap 한다고 할까? 아니면 사전 풀이 그대로 가볍게 두드림? 그럼 "저 가볍게 두드림으로 계산할게요." 그러면 종업원이 "네 여기 가볍게 두드리세요." 그럴까? 아니면 "저 살짝 댐으로 결재할게요." "네 여기 살짝 대세요."??? ㅋㅋㅋ) 
산행 날은 토요일이었다. 산에는 가고 싶은데 일요일은 눈이 예보되어 있었다. 장기 예보를 보니 다음 주말도 더 춥고 날이 안좋았다. "에잇! 그냥 날라 버리자." 

4도. 세월에 장사 없는 건 사람만이 아닌 모양이다. 추위도 많이 쇠락했다. 하지만 추위는 올 겨울이면 다시 새파랗게 젊어져서 서슬 퍼런 추위를 몰고 올 것이다. 사람도 그렇게 일 년 중 다시 젊어지는 계절이 있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본다. ㅋ 날이 너무 좋아서 희철이 형 조끼는 벗어 두고 가기로 했다. 뭉치면 한 주먹 크기의 새털처럼 가벼운 희철이 형 조끼는 얼마나 따뜻한지 아무리 추워도 땀에 흠뻑 젖곤 한다. 수로 옆 도로에 눈이 많이 없어 보여 스노우 슈도 놓고 가기로 한다. 지난번 킹 크릭 갔을 때처럼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눈도 다져지고 길도 뚜렷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15분 만에 아니올시다로 판명됐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없다. 주차장에 있던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걸까? 눈에 덮인 아주 희미한 자국을 따라 눈 속으로 풍덩 빠져 허리까지 차오른 눈 속을 헤치고 산길로 들어섰다. 두 시간을 헤매고야 겨우, 오늘 생긴 것 같은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쪽 산들이 다 그렇듯 경사가 굉장히 급한데도 수목한계선을 벗어날 때까지는 눈도 많았다. 눈이 많으면 아이젠은 아무 소용이 없다. 허방을 딛는 듯한 눈길에서 체력이 쉽게 고갈된다. 스노우 슈 안 가져온걸 땅을 치며 아니 눈을 치며 후회했다.
수목한계선을 벗어나니 추위가 몰려온다. 패딩을 하나 더 껴입고 두건을 쓰고 헬맷을 썼다. 그래도 능선에 섰을 때는 손발이 다 꽁꽁 얼어있었다. 추운건 추운 거지만 바로 턱밑에서 올려다보는 쓰리 시스터즈의 웅장함은 과연 Jaw dropping,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다. 

 

쉬워 보이는 능선을 따라 Hiker's Summit이라 부르는 False Summit의 케른과 저 멀리 바위 릿지 위의 정상이 보인다. 왕복 1시간 남짓 거리 같은데 체력도 떨어지고 시간도 늦었고 무엇보다 너무 추워서 정상은 포기하기로 했다. 또 한 번 밀린 숙제로 남았다. 그런데 하산하면서 이 숙제를 우선순위로 꼭 해야 할 일이 발생했다. 한참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내려와 지치기도 해서 엉덩이 썰매를 타려고 털썩 주저앉으니 왼쪽 발의 아이젠이 달아나고 없었다. 이 아이젠은 한국에서 공수해온 탈부착이 쉬운 아주 맘에 드는 워킹용 아이젠이다. 여기서는 돈 주고 살래야 살 수도 없는 좋은 제품이다. 아이젠이나 스노우 슈를 신을 때 조임 끈을 너무 꽉 조이면 발이 더 시리다. 그래 조금 느슨하게 조였더니 이런 사달이 생겼다. 봄에 눈이 녹으면 꼭 다시 와서 찾아야겠다.
올해는 유난히 눈도 많이 내렸다. 여기는 산악 지방이라 그렇다해도 우리 아들이 사는 곳은 태평양과 대서양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대륙의 한가운데 평야인데도 지난 겨울엔 1970 몇 년 이후로 가장 많은 적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은 1970 몇 년 이후로 최소 강우량의 신기록을 세웠다고 하니 눈비는 바다와는 상관이 없는 건지 아니라면 지구가 어딘가 심하게 앓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Ship's Prow Summit은 알란의 책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산이다. 반면에 하링픽은 알란의 책에 수록되어 있었다. 물론 easy지만. 하링픽은 몇 번 산행을 했었고 적설기에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고생도 했었다. 하지만 하링픽은 이제는 거의 관광지화 해서 계단도 설치되어 있고 가파른 곳은 줄도 설치해 놓아서 알란의 스크램블 북에 올라갈만한 산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에 비해 Ship's Prow Summit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 있고 정상 바로 밑에는 짧은 스크램블도 있다고 하니 알란의 책에 더 어울린 만 한데 왜 수록을 안 했는지는 의문이다. 같은 easy의 등급을 받는다 해도 내 경험으로는 Ship's Prow가 Haling Peak 보다는 조금 더 difficult 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나는 생각보다 많은 눈에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이긴 해도 easy한 산 정상에도 못 가고 아이젠도 잃어버리고 쇠락했을 거라 믿었던 추위에도 아주 혼쭐이 났다. 이러고도 스크램블을 꿈꾸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모르겠다. ㅎ...


* 카카오톡에 올려진 제 글을 열면 사진 확대가 안되는데 다음 메인 화면에서 블로그로 들어가 제 블로그를 찾아 들어가시면 휴대폰에서도 사진 확대가 가능합니다. 조금 불편하셔도 블로그로 들어가시면 사진을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파란색 화살표부터 하링픽, 매너픽(녹색), 로렌스 그라시(빨간색), Ship's Prow Summit(주황색)
뱃머리 같아 보이시나요?
이건 어떠세요? 피존 마운틴에서 찍은 사진을 확대한것. 중앙의 정상이 Ship's Prow Summit 오른쪽이 Mt. Lawrence Grassi
수로를 건너자 마쟈 왼쪽으로 작은 주차 공간이 있다.

 

인공 수로 옆 길을 따라 500m 쯤 들어간 곳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사진 왼쪽의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들어갔는데 눈이 깊었다.

 

가야할 길
올라온 길과 Goat Pond
겨우 능선. 아직 정상은 아니다. 오늘의 끝.
파란색 화살표가 Hiker's Peak이라 부르는 False Summit, 그 뒤가 Ship's Prow Summit(빨간색), Mt. Lawrence Grassi(노란색) 그 뒤의 하얀봉우리는 Rundle 이라고 함.
Three Sisters

 

 

1,739m에서 출발했으니까 대략 836m를 올라왔다. 시간은 오후 2시 33분. 4시간 40분만에 능선에 섰고 2시간을 하산했다.
내려 가야만 하는 길
집으로 가는 길. 수로 건너편은 Goat Mt. 과 Mt. Nestor. 네스토 마운틴은 올해 올라갈 산 중 하나다.

 

보시는 바와 같이 알란은 이 산을 easy로 구분해 놓았다. 정말 easy 할 것 같습니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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