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처럼 비가 내린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은 편이다. 덕분에 산불이 줄어서 대기가 맑아져 캐나다의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비 때문인지 기온이 낮아서 낮은 산에도 아직 잔설이 많이 남아있다. 한국은 벌써 더위하고의 한판 승부가 시작된 모양인데 여기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잘 때는 홑이불이라도 한 장 덮어야 할 만큼 춥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늘 혼자, 그것도 주로 바위가 많은 산을 가니까 날씨가 안 좋으면 산행을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어제도 날씨 검색을 했었다. 일기 예보는 구름이 낀 날씨이긴 해도 오후 5시 이후에나 0.3mm 정도의 비만 내린다고 했었다. 오늘은 일행이 있지만 솔직히 비가 오는 걸 알았어도 산행을 취소했을지는 의문이다.
토요일 오후 아주 오랜만에 갑장 연성우 씨가 연락을 해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캐나다 데이인 월요일 산행을 하기로 의기투합이 되었다. 한인회에서도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 좋은 연성우 씨가 인맥이 넓어서 같이 산행할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박진남 왕누님을 초대해 그렇게 셋이 되었다.
전에 지갑을 안 가져와서 동전을 긁어모아 기름을 넣었던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고 피존 마운틴 주차장으로 가보니 구름이 짙게 드리워 산을 볼 수가 없었다. 오늘 가는 산은 윈드 타워(Windtower). 1번 하이웨이 옆 피존 마운틴 쪽에서 보면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바위 타워이다. 일행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오늘 얼마나 힘든 산을 가는지 겁을 주려고 했지만 날씨가 내 계략을 망쳐버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웨스트 윈드패스(West Wind Pass)에 올랐을 때는 비가 조금 그쳤지만 구름이 잔뜩 껴서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고 구름이 껴서 시계가 안 좋아 일행을 실망시키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이 산은 아주 높지는 않지만(2695m) 양옆으로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산에 둘러싸여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이다.
바위 렛지가 많은 트레버스 지역에 들어섰을 때 가끔씩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구름을 몰아가 윈드 타워 정상이 보이기도 하고 산 아래 스프레이 레이크의 에메랄드 빛 물색을 보여주기도 한다.
윈드타워 능선의 아래 부분에 도착했을 때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있었다. 구름 사이로 간간이 보여주는 경치가 아름다워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올해 첫 산행이시라는 왕누님도 왕년의 박진남여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옛날처럼 날아다니지는 못하지만 연세에 비해서는 정말 잘 걸으신다.
능선에 올라섰을 때 햇볕이 나고 바람이 불어 젖은 재킷이 마르면서 기분도 상쾌해지기 시작했다.
윈드 타워 정상에서의 조망은 밴프 국립공원 주변을 다 합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거라고 확신한다. 록키를 제법 많이 다니신 왕누님이나 연성우 씨도 감탄을 연발한다.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나면서 그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어서 정말 운이 좋았다. 코비드가 한창일 때 이 산에 왔던 거 같은데 후기를 찾아보니 불과 2년 전에 왔었다. 정상의 레지스터 노트에 그때의 기록이 남아 있을까 찾아보니 이름이 없었다. 어떤 산은 3-4년 전 기록도 볼 수 있는데 이 산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레지스터 노트가 바뀐 것 같았다. 바람도 강하지 않아서 사진도 많이 찍고 간식도 먹고 수다도 떨면서 정상에서 30분 정도 푹 쉬고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올 때는 능선 엣지로 붙어 마운틴 라피드와 사이의 깎아지른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를 보면서 내려왔다. 어디서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주차장에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다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가까운 랏지로 옮겨 컵라면과 왕누님이 싸 오신 김밥과 맛난 짠지로 저녁을 대신하고 저녁 늦게야 에드먼튼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함께 산행한 박진남 왕누님과 연성우 씨 고생 많으셨고 너무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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