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등산화가 사라졌다.
아침에 등산복을 입으려고 옷방에 들어갔다가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몰라 잠깐 당황했다. 언젠가도 말했듯이 작업복으로 등산복을 입으니까 산에 가면서 작업복을 입어야 해서 그랬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했다. 그런데 등산화가 없었다. 지난 마지막 산행 때 잔설이 남아 있을 거 같아 겨울용 등산화를 신었는데 눈 없는 산에서도 편안해서 이번에 한번 더 신으려고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산에 갔다 와서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여름용 등산화를 가지고 갔다.
일이 많이 줄었다. 작년 이맘때는 일이 바빠서 나 같은 장롱 면허를 가진 사람도 쉽게 취직이 되었는데 올해는 일이 없어서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린다. 미국 트립 한지는 벌써 몇 주가 지났고 요즘은 지방 소도시를 다니는 야간 운전을 한다. 이런 트립은 트레일러 채 배달을 하는 거라 하루에 네 번 트레일러를 바꾸어 달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트레일러를 떨어뜨리는 사고를 방지하려고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아니다. 요즘 자주 깜빡깜빡하는 거 같아 일을 하는 동안은 거의 노이로제 수준으로 안전 수칙을 되뇌고 있다.
산에 가면서 생각을 해보니 내 겨울 등산화는 지난 산행 이후 본 기억이 안난다. 산행을 갈 때는 늘 샌들을 신고 등산화는 운전석 뒷좌석 바닥에 싣고 가고 산행이 끝나면 또 그렇게 갈아 신고 오는데 지난 산행 이후 일하러 다니면서 뒷좌석 바닥에 신발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마지막 산행 때 신발을 갈아 신고 싣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산행 후 집에 와서 다시 찾아봤는데 손바닥만 한 집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걸로 봐서는 멀쩡한 신발을 버리고 온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내가 집안 어디에다가 모셔 놓고 그걸 기억 못 한다면 그건 또 더 큰 문제이지 싶다.
요즘은 무엇에 한번 생각이 꽂히면 도체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는 거 같다. 외출을 하면서 리모컨으로 아파트 차고문을 열어 놓고 나가려다가 '어? 누가 문을 열었지? 다른 차가 들어오나?' 하고 기다리는 멍청한 경우도 생긴다. 하긴 뭐 그런 정도는 약과 일지도 모른다. 멀쩡한 사람을 버리고 올 일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지난주에는 일이 없어서 gym에서 노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좀 무리를 해서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이제는 진짜로 늙은 건지 루틴 보다 조금 많이 하면 쉽게 다치고 또 다치면 잘 안 낫는다. 목요일 밤까지 3일 연속 야간 일을 하고 금요일 오전에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려고 일찍 일어났다가 오후에 낮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다음날 산에 가야 하는 금요일 밤잠을 망쳐버렸다. 산에 가는 날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설사를 왕창 해버렸다. 생각해 보니 전날 저녁에 냉장고에 오래 보관된 귤을 먹었는데 그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그래도 기왕 마음먹은 길에 그냥 산에 가기로 했다.
거스트 픽(Gusty Peak 3000m)
이번이 세번째 도전이다. 첫 번째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갖고 왔었고(Fortress 산행 후기 참조) 두 번째는 등산로가 폐쇄되어서 산행을 못했는데 이번엔 게이트가 활짝 열려 있고 주차된 차도 스무 대는 넘어 보여서 어쩌면 오늘은 혼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했다.
이번에 사진을 먼저 올린 이유는 사진을 보고 얼마나 무시무시한 산인지 얼마나 어려운 산을 도전하는지 잘난 체를 하려고 그랬다. 그런데 잘난 체는커녕 산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알란 케인의 가이드 북에는 이 산의 등급이 자그마치(?) easy 등급이다. 보기와는 딴판인 셈이다. 하지만 언젠가도 말한 것처럼 알란 케인의 easy 등급은 위험하지 않다는 의미이지 힘들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체스터 산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둘러싸인 체스터 레이크는 풍광이 정말로 아름답다. 당연히 호수까지의 트레일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내려올 때 보니 호수에서 낚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처럼 플라이 낚싯대로 진홍색이나 연두색의 낚싯줄을 멋진 원을 그리며 호수에 던져 넣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호수를 지나 분지로 오르니 여자 1명 남자 2명인 팀이 쉬고 있었다. 그들은 Fortress로 가고 나는 Gusty Peak으로 가면서 오늘도 결국 혼자가 되었다.
길다운 길이 없는 아주 가파른 스크리(잔자갈) 길을 오르면서 이만하면 최악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할 때쯤 최악의 스크리 지대를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허리에 통증이 심해지면서 자연히 폴을 쥔 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서 팔과 어깨가 빨리 지치기 시작했다. 아침에 설사 때문에 탈수 현상이 오는지 갈증이 심해져 가져간 게토레이 3병 중 벌써 두 병을 마셔버렸는데도 목이 탔다.
픽베거 앱의 루트는 내 오른쪽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아주 미끄러운 스크리 지대를 트레버스 하느라 정말 많은 힘을 소진해 버렸다. 트레버스를 하고 공룡의 비늘 같은 아주 날카로운 바위 능선에 올라섰을 때는 구역질이 올라와 눈물, 콧물, 침과 땀으로 엉망이었는데 손수건도 없었다. 바위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꿈을 꾸듯 분지로 내려왔다.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점심을 먹으려다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많이 늦어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인 게 아니라 1시간 넘게 잠을 잔 모양이었다.
Gusty Peak은 아무리 easy라도 치매끼가 있는 노인이 함부로 덤빌만한 산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40분 끌로 올라가서 15분 타고 내려왔던 걸 기억하는 걸 보면 아직 치매는 아닌듯도 하고... 자전거로 정확히 15분 타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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