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토 폰드(Grotto Pond)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수의 동양인들이 보여서 조금 의아했다.
루트 안내 표지판 앞에 서너 명, 화장실 앞에도 두세 명 차 뒷문을 열어 놓고 등산화를 신는 사람도 있었고 배낭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캘거리 하이킹 클럽이 여기를 온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렇게 회원이 많을 줄은 몰랐다.
오늘 올라갈 산은 앵클바이터 릿지(Anklebiter Ridge). 작년 가을 산행 검색할 때 캘거리 한인 산악회가 등산한 걸 보고 이 코스를 처음 알았고 언젠가 가봐야지 하던 참에 캘거리 산악회가 간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온 셈이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등산을 시작하려고 할 때 산행 코스 안내판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한 무리의 팀이 있었는데 주차장에 있던 동양인들의 전부가 아니어서 나머지 사람들 혹은 사진 찍는 팀이 중국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등산로로 들어섰다.
그로토 캐년 트레일과 갈림길에서 GPS를 보고 있는데 뒤따라 오는 열명쯤 되는 팀 속에서 한국말이 들린다. 자연스럽게 한국말로 인사를 하고 그 팀을 뒤따라 가면서 맨 뒷사람에게 '산악회에서 오셨어요?' 하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속으로 살짝 의아해서 그렇다면 주차장에 남은 사람들도 한국 사람인가 생각하며 그들을 추월해 혼자 정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산행을 검색할 때 등반 높이가 820여 미터라고 해서 이 근처에 이렇게 높이 올라가는 산이 있었나 싶었는데 전체 높이(2138m)가 높지 않아서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하이웨이(1A) 바로 옆에 붙은 산이라 시작부터 경사도가 만만치 않았다. 또 대부분이 바위 루트라 네발로 기어야 하는 스크램블 산행이었다.
첫 번째 바위 렛지(Ledge)에서 뒤따라 온 한국팀의 사진을 찍고 내처 올라 2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사진을 찍고 탄약통을 열어 레지스터에 기록을 남기고 올라온 길을 내려다 봤는데 올라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산행을 검색할 때 올라온 길로 하산하는 코스 말고 블루매트 힐로 하산하는 루프 코스가 있었는데 정상 주변이 빙 둘러 낭떠러지라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어 산악회가 오면 따라 내려가리라 생각하고 탄약통이 있는 케른 옆에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등산 중에 자는 건 내 특기라 한참 자고 있는데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3-4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남자 한분이 나를 내려다보고 섰는데 잠결에 한국 사람인 줄 모르고 처음엔 서로 영어로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고 가까이에서 보니 동양인이라 다시 한국인임을 확인하고 아까 밑에서 만난 팀인가 물어보니 아니란다. 묻길래 혼자 왔다고 대답하니 자기는 팀이 있다고 한다. 속으로 이게 뭐지? 하면서 헷갈려하고 있는데 조금 후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올라오면서 먼저 온 사람과 합류한다. 그 사람들 말이 밑에서 한 팀을 추월했는데 자기네는 다른 팀이라고 한다. 그럼 캘거리 하이킹 클럽이냐고 물으니 뒤에 올라오는 팀이 하이킹 클럽이 서너 팀으로 쪼개지면서 갈라섰는데 그중 한 팀 일거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주 우연히 각기 다른 한국 사람 세 팀이 한 등산 코스에서 만난 셈이었다. 요즘이 시즌 적으로 갈만한 산이 많이 없다 해도 산에 다니면서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3주 전에 마운틴 볼디 싸우스 코스에 갔을 때도 열명쯤 되는 한국인 팀을 만났었는데 그 사람들도 산악회 소속은 아닌데 친한 사람들끼리 온 캘거리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들도 어느 팀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 아닌가 싶고 어떤 이유로든 갈라진 산악회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팀이 정상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을 한발짝 떨어져서 관찰을 해보니 복장에서부터 신발이며 배낭에서 보이는 짬밥 수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들이 하산을 준비할 때 불르매트 힐로 하산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해서 실례가 안 된다면 뒤로 따라붙겠다고 하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그들을 따라 낭떠러지 바로 옆의 아주 가파른 스크리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맨 뒤에 선 내가 자칫 실수라도 해서 미끄러지면 내 앞에 내려가는 사람에게 충격을 줘서 줄줄이 낭떠러지 밖으로 튕겨 나갈 거 같아 거리를 두고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한 150여 미터쯤 내려왔을까 맨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돌아서면서 빽(Back)이라 소리치며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라고 한다. 밑에 아직도 눈이 두껍게 깔렸는데 슬러시 형태로 많이 녹아서 그 위를 건너다 눈과 같이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어 올라온 길로 돌아 내려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다시 정상에 올라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역시나 대부분의 멤버가 산행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들이다. 어떤 여자분은 25년이 넘는다고 하니 내 캐나다에서의 등산 경력 13년과 한국에서 형을 따라 산에 다닌 경력에 대학 때 산악회 경력을 다 끌어 모아도 25년이 될까 말까 한데 그것도 캐나다 록키에서만 25년이니 대단한 산악인인 셈이다. 당장에 이웃에 있는 갭 픽(Gap Peak)과 페이블 마운틴(Mt. Fable)을 올랐다고 하니(이 두 산은 높이도 높지만 지형이 험하고 무엇보다 하이웨이에서 멀리 떨어져 어프로치만도 오래 걸리는 산이다. 물론 나는 못 가봤다.) 내가 본 짬밥이 틀리지 않은 셈이다. 얘기 중에 어떤 분이 밴프 곤돌라가 내려오는 건 공짜라고 하길래 내가 끼어들어 정말 공짜냐고 물으니 로컬 사람들에게만 공짜라고 한다. 로컬이 캘거리도 포함되냐고 물으니 밴프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누가 밴프에 사는 사람이 있냐고 묻자 어떤 여자분이 자기가 밴프에서 37년째 산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혹시 금은방 하시는 분 아니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헐~
혹시 10여년 전에 허벅지까지 눈에 빠지던 날 레이디 맥도널드 산행하신 걸 기억하냐고 했더니, 얼른 어쩐지 어디서 봤다 싶더란다. 그 바람에 얘기가 급속도로 바뀌어 옛날에 같이 산행하던, 지금은 돌아가시거나 한국으로 들어가신 분들 이름이 튀어나오며 다 같이 잠간이나마 즐거운 과거로의 여행을 하게되었다.
정상에서 10분쯤 내려왔을 때 처음 밑에서 만난 팀을 다시 만났다. 한사람이 컨디션이 안 좋아 낙오를 하는 바람에 산행 전체가 느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맨 앞에 올라오신 분이 왠지 낯 설지가 않다. 그분도 말은 안 했지만 어쩐지 나를 알아보는 듯도 하다. 그들을 지나쳐 맨 뒤에 쳐진 일행을 만났을 때 저 앞에서 리드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으니 캘거리 하이킹 클럽을 최초에 만든 사람인데 사업 때문에 아웃 오브 타운(Out of town)에 살다가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캘거리로 들어와서 깨진 하이킹 클럽을 다시 재건중이라고 한다. 10년 전쯤에 에드먼튼 산악회가 깨지고 캘거리 하이킹 클럽을 따라 몇번 산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 그래서 사람은 어디 가서 나쁜 말 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아 말을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단체가 깨지는 건 비단 한국 사람들의 모임뿐만은 아닐 것이다. 정상에서 만난 분들도 원래는 캘거리 한인 산악회 소속이었는데 지금은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끼리 뿔뿔이 다 흩어지고 몇 사람 안 남았을 거라면서 내가 에드먼튼 산악회 깨진 걸 아쉬워하는 만큼이나 말하는 목소리에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다.
바윗길이라 내려오는 길이 올라갈 때 보다도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듯 하다. 남자 셋 여자 넷의 이 그룹의 평균 연령이 내 나이보다 많아 보이는 이 분들은 겁이 많거나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젠 무릎에 힘이 없어 더 빨리 내려오지 못할 뿐이다. 가야 할 길이 먼 나는 할 수 없이 중간에서 작별을 고하고 먼저 서둘러 하산했다. 혼자 내려오면서 생각나는 말은 프랑스 속담 '아! 젊은이에게 지혜가 있다면 아! 늙은이에게 힘이 있다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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