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동쪽 하늘 중천에 그믐달이 걸려있었다.
그믐달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다음 지식을 검색해보니 계절에 대한 언급 없이 '그믐달은 새벽에 동쪽 지평선 부근에서 잠시 볼 수 있다.'라고 한다. 물론 한국 이야기일 테지만 달도 분명히 동쪽에서 뜨는 걸로 알고 있는데 새벽에 동쪽에서 떴다가 동쪽으로 금방 진다는 얘긴지 동쪽에서 뜬 태양 때문에 금방 안 보인다는 말인지 모를 말이다. 여름이라면 지금은 한참 밝을 텐데 그래도 달은 보일까 생각이 들었다. 암튼 여기는 지평선보다는 한참 위인 중천에 떠있었다.
차가 2시간을 달려 서쪽으로 향하는 데이비드 톰슨 하이웨이(David Thompson Hwy)에 들어섰을 때도 룸미러로 달이 보이는 걸로 봐서 잠시는 아닌 것 같다.
달이 밝지 않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별도 많이 보였다. 날이 좋을거라 생각이 들었다.
노르덱(Nordegg)을 지나 아브라함(Abraham) 레이크에 도착하니 왼쪽의 호수 건너에는 해가 쨍쨍한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트레일 입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쌀쌀한 날씨에 내리는 비를 맞고 산행할 만큼은 아니었다. 잠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잠이 들었다. 내가 코 고는 소리에 놀라서 깰 만큼 아주 달게 40분을 잤다.
갓길의 트레일 헤드 주차장은 겨우 차가 다섯 대나 주차할까 말까 한 작은 주차장이었다. 물론 나 혼자다.
맑은 계곡물 소리가 청명하게 들리는 개천을 따라 산행이 시작되는데 금방 오른쪽 능선으로 갈라진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을 만한 지역의 산 치고는 등산로가 뚜렷했다. 이 산은 처음 릿지로 올라설 때와 마지막 정상에 오를 때만 아주 가파르고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쉬운 오르막이다. 릿지로 오르면서 보이는 아브라함 레이크와 그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서 힘든 줄 모르고 쉽게 올랐다. 등산 루트는 릿지를 따라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 두세 개를 넘어가는데 봉우리를 넘으면 아주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어떤 곳은 마치 서울 외곽의 산성길을 걷는 기분이다.
능선은 밑에서 보기 보다는 넓은 편이다. 그런데 두 번째 봉우리와 세 번째 릿지 사이는 아주 크고 아주 좁은 바위의 절리(그런 게 절리 현상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로 칼로 벤 듯 싹둑 잘려 있었다. 약간 우측으로 기운 직각에 가까운 두 면의 접점으로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는데 그곳으로 내려가 가파른 걸리를 거쳐 처음 올라온 계곡으로 내려설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디 암장이 있어 바위 하는 친구들이 다닌 건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산에 다니면서도 처음 보는 신기한 자연현상이 인상 깊었다. 그런데 분명히 사진으로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아무리 찾아도 사진이 없었다. 날씨가 추워져 핸드폰을 꺼내고 장갑을 벗고 하는 게 귀찮아서 아마도 마음속으로 찍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여우가 시집 가는 날인지 산행 시작할 때부터 오락가락하던 비가 세 번째 릿지에 올라서니 싸락눈으로 변해 햇살 속에서 찬바람과 함께 내 후드를 요란하게 때린다. 다행인 것은 이 산의 높이(2,454m)가 수목한계선의 높이와 비슷해서 정상 가까이까지 나무가 있어 바람 피할 데는 많았다.
세 번째 릿지는 릿지 가운데 벼슬(Ridge Crest)처럼 바위 군락이 서 있고 좌우가 낭떠러지지만 벼슬 좌우로 공간이 많아 어느 쪽으로든 안전하다고 느끼는 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마지막 정상 봉우리 바로 밑이 유일한 스크램블 구간인데 아주 아주 아주 쉬운 스크램블이다.
정상은 아주 특이했다. 평평하고 널찍한 정상 한가운데 작은 케른에 막대가 꽂혀 있고 이상한 쇠기둥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자물대로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돌로 입구를 막아놨다. 돌을 들어내면 쇠통 안에 물이 고여있는 게 보이고 물 위에 레지스터 노트가 들어있는 작은 플라스틱 통이 떠 있었다. 레지스터 통을 보호하는 쇠통이 있는 건 처음 본다.
이 산의 정상은 같은 높이의 봉우리가 두 개라는데 한 4-50미터 내려갔다 올라가면 될 것 같았지만 너무 추워서 생략하기로 한다.
정상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이려고 부지런히 몸을 놀려 내려가는 중에 무언가 왼쪽에서 내쪽으로 빠르게 달려드는 생물체를 느끼고 깜짝 놀라 '으악' 소리를 지르며 멈춰 섰다. 내 소리에 놀란 그 생물체도 '헉' 소리를 내면서 멈추었는데 사람이었다. 서로 민망해하면서도 아닌 척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름은 타일러(Tylor). 노르덱 근처 어떤 회사에 근무하는데 off 때마다 근처 산을 다닌다는 젊은이다. 주차장에 차가 있어서 사람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자기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타일러와 헤어지고 내려오면서 이런 식으로 곰을 갑자기 만난다면 배낭에 꽂혀있는 곰 스프레이가 뭔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나의 최애 산이 또 바뀔지도 모르겠다. 1,024m를 꼭 3시간만에 올라갔다. 총 산행 시간 5시간 10분. 이렇게 짧고 쉬운 산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산이니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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