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후기

Bald Eagle Peak (2021년 9월 26일)

진승할배 2021. 10. 3. 12:57

산을 그렇게 다니고도 난 아직도 빽(Back)이 안된다.
어제는 거의 조난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처럼 하늘에서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인터넷으로 갈만한 산을 검색하는 중에 '캔모어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랜드마크'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캔모어의 랜드마크라면 하링픽(Haling Peak) 아닌가 생각하면서 골치 아픈 영어를 읽어 내려갔다.
"Anû Kathâ Îpa" 읽기도 어려운 이 단어가 랜드마크라는 산의 이름이다. Stoney Nakoda 원주민의 언어라고 한다. 영어로 번역하면 Bald Eagle Peak. 그런데 이 산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동안 이 산의 이름은 그 생김새를 본 떠 "Squaw's Tit"이었다고 한다. Squaw는 원주민 처녀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우리 식으로 하자면 "땡자의 젖꼭지"라는 유치한 이름의 산이었던 셈이다. 
Stoney Nakoda 원주민들은 이 산의 이름이 인종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이라는 이유로 오랜동안 산의 이름을 바꾸려고 투쟁을 해왔고 마침내 꼭 1년 전인 2020년 9월 29일 공식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산행의 어려움을 표현할 때 등반자의 경험이나 능력 또는 그 날의 컨디숀에 따라 어려움의 정도가 달리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난 주로 Bob Spirco나 Steven Song의 산행기를 참고한다. 우선 그 둘의 산행 경험이 풍부해서 내가 가고자 하는 산의 산행기가 대부분 있기 때문이고 또 그들이 생각하는 어려움의 정도가 내 경험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티븐은 우리 아들 또래의 젊은 친구라 체력적으로 조금 감수해야 하는 부분은 있다.
이 산에 대한 그들의 표현은 "Bald Eagle Peak was an enjoyable scramble" (Bob), "I was surprised by how much of hands-on scrambling involved. However, nothing too exposed nor difficult." (Steven)이다. 둘 다 산에 어프로치 할 때 등산로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산행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고 했다. 게다가 스티븐은 오전에 Pigeon Mountain을 끝내고 캔모어 맥도널드에서 점심을 먹다가 즉흥적으로 볼드 이글 픽을 올라가기로 결정을 해서 2시간 2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고 한다. 
나는 마침 등산로 입구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노인을 만나 그 분이 딱 트레일 입구까지 데려다주는 덕분에 그나마 덜 고생한 편이었다. 산 아래쪽은 마치 주름진 앞치마를 펼쳐 놓은 듯 푹신한 이끼가 덮여 있는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다 보니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데마다 표식기가 걸려서 조금 과장하면 어떤 곳은 마치 우리네 성황당 주변같이 울긋불긋하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면 경사가 제법 급해지기 시작하는데 릿지를 타는 것도 아니요 계곡을 오르는 것도 아닌 그냥 산의 한쪽 경사면을 오르는 루트다 보니 인수 대슬랩 처럼 크고 넓은 슬랩도 만나고 힘든 스크리 지역도 올라야 바위 릿지에 올라선다. 근데 바위 릿지가 왼쪽은 제법 높은 낭떠러지지만 오른쪽으로 우회도 가능하고, 가파르지만 홀드가 많은 바위 사면을 오르는 거라 어렵진 않았는데 마지막 한두 구간은 어쩔 수 없이 좁은 바위 릿지를 넘어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스크리 지역이 끝나고 바위 릿지로 올라서기 직전에 쉬고 있을 때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 둘이 나를 지나쳐 올라갔는데 미리 말하자면 이 친구들이 오늘의 은인이었다. 

릿지를 타고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 섰을 때 나를 지나친 청년 둘이 그 봉우리 정상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면서 정상에 안 갈 거냐고 물으니 정상이 가파라서 자기네는 여기까지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보고 정상에 갈 거냐고 묻기에 시도는 해봐야지라고 대답하면서 몇 걸음 지나쳐 "Hey Guys~ Let's try!" 하니까 벌떡 일어나 따라온다. 그러고는 나를 지나쳐 나보다 몇 걸음 앞서서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좁았다. 그저 성인 대여섯명이 일렬로 설 수 있는 정도였다. 정상에 레지스터 통은 없고 쇠로 된 칼이 꽂혀있었다. 젊은 친구들이 내려가기를 기다려 동영상을 찍고 따라 내려가니 그들은 벌써 자기네들이 앉아 쉬던 봉우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올라 온 릿지로 내려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생각하면서 정상 밑 안부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4시간 20분 만에 정상에 올라왔으니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까망베르 치즈 아니 까망껍지르 치즈, 빨강껍지르 치즈 두 개를 벗겨 먹고 귤을 까먹고 양갱을 먹고 또 마가렛트 3개를 먹으면서 경치를 감상하고 Bob의 루트대로 가파른 gully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주 가파른 스크리 지역을 어느 정도 내려와 이제 릿지로 올라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올라갈 만한 길이 보이질 않았다. GPS의 루트 맵을 보니 아직 릿지 합류 지점까지는 내려온 만큼 더 내려가야 했다. 그러고 그만큼 더 내려가서 GPS를 보니 이젠 오히려 릿지 합류 지점보다 훨씬 더 밑에 표시되었다. 불과 2-3분 차이였는데 오늘따라 위성의 신호도 늦는 듯했다.(도둑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더니 오늘이 그랬다.) 그나저나 등산로를 벗어난 걸 안게 너무 늦었다. 아니 그때라도 스크리를 다시 기어 올라갔어야 했다. 경험 상으로 계곡 길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으로는 되돌아가기가 안되었다. 그런데 오른쪽 바위 릿지 위에 있어야 할 젊은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굉장히 빨리 하산을 했나 보다 생각하니 더 불안해졌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갈까 어쩌나 하면서도 계속 가파른 gully를 내려갔다. Gully는 더 좁아졌고 가팔라졌고 이제는 오른쪽의 릿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산에 다니면서 운 좋게 스스로 헤쳐 나오긴 했지만 거의 조난에 이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 적도 있었다. 느낌 상으로 오늘이 조난의 조짐이 보였다. 머릿속으로 조난을 가정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물은 500ml 한통이 남았고 먹을 거라곤 너트 그라놀라 바가 한 개 있다. 아니다 배낭 멘 위 포켓에 지난여름 내내 녹았다 굳었다를 반복한 초코바가 한 개 있던 게 생각났다. 올해 배낭에 넣은 기억이 없으니까 적어도 1년은 넘었겠지만 여전히 뜯지 않은 채다. 다행히 곰 스프레이는 챙겼다. 곰이 아니라도 다른 동물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는 있을 터였다.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그때였다. 저 좁은 계곡 밑에 짠~ 하고 사람이 나타났다. 정말 깜짝 놀랐다. 멀어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상에 같이 올라갔던 젊은 친구들인 듯싶었다. 근데 저 친구들이 어떻게 저기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가상현실에 있는 듯하다. 아니면 하루키의 말대로 저들은 진짜 사람이 아닌 생령인가 싶었다. 부지런히 따라 내려가니 아주 좁은 건폭 같은 매끄러운 바윗길을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물이 흐르면 작은 소가 있을 5-6 미터 높이의 바윗길을 두 번 내려갔다. 바위는 매끄럽고 홀드도 없어서 Wide chimney 처럼 다리와 팔을 각각 한쪽 벽에 기대고 엎드려 뻗쳐 자세로 내려갔다. 정말 위험했고 진짜 무서웠다. 그런데 앞서 내려간 랜디(나중에 위험한 구간을 벗어나서 통성명을 했다.)가 더 안 좋은 소식을 전해줬다. 아래는 50피트(약 15m)가 넘는 폭포인데 도저히 못 내려간다고 한다. 그러고는 우리가 내려간 계곡 오른쪽의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자일 한동 길이는 충분히 될만한 높이(3-40m)를 기어오르는 랜디를 보는 것만도 긴장이 된다.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중간에 소나무도 있고 홀드도 확실해서 고도 감만 빼면 별로 어려울 건 없었다. 

작은 능선에 올라 한숨 돌리고 비로서 통성명을 했다. 랜디(Randy)와 저스티스(Justice). 능선에 올라선 걸 봤는데 어떻게 여기 계곡으로 내려왔냐니까 자기네도 모른다고 한다. 
거기서부터는 bushwhacking(삼림을 헤치고 나아감 ; 다음 사전)이다. 앞장선 랜디가 앞을 막는 마른나무 가지를 부러 뜨리는 "딱, 딱" 소리가 작은 계곡에 울린다. 가파른 경사면을 횡으로 건너며 작은 릿지 서너 개를 넘었다. 젊은 친구들은 쉴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쉬자고 할 수도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죽기 살기로 따라붙었다. 

천만다행으로 무사히 하산을 완료했다. 랜디와 저스티스와 헤어지자마자 이끼 낀 잔디밭에 그대로 쓰러졌다. 누워서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니 참 기가 막혔다.
그나저나 랜디와 저스티스가 어떻게 그 계곡에 있었는지 정말 미스테리다. 만약에 내가 그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내가 그 건폭을 내려오고 그 절벽을 기어오를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들이 있었기에 혹시 다쳐도 누군가는 내려가서 구조를 요청할 테니까 용기를 내었지 싶다. 

2,514m. 록키에서는 낮은 산에 속한다. 작은 산이라고 깐본건 아니지만 긴장을 덜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사고는 기대(?) 하지 않은 곳에서 터지는 법이다. 
불과 몇주전에 위험한 산행은 안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홍명이가 이 글을 읽는 다면 "저 양반 또 쓸데없는 짓을 했네."라고 구박할게 틀림없을 것이다. ㅋㅋ
하느님이 랜디와 저스티스라는 구원의 밧줄로 나를 한번 더 살려주신 것 같다.
"Randy & Justice! 진심 Thank you~!"

 

 

No, 1 하이웨이에서 본 Bald Eagle Peak
Community Hall 어린이 놀이터 옆에 주차를 했는데 트레일 입구에서 너무 멀었다. 

 

 

 

비로소 릿지. 윌리를 찾아보세요. 이 사진부터 사진마다 랜디와 저스티스가 있습니다. ㅋ

 

 

여기부터 윌리 없네요.
올라온 길
앞 바위 왼쪽 위에 젊은 친구들이 있네요.
정상 밑 안부에서 정상 바위 왼쪽으로 돌아 정상에 올라간다. 어쩐 일인지 거기서 사진을 못 찍었다.

내려갈 때 찍은 동영상. 랜디가 릿지를 넘어가고 있다.

왼쪽이 Mt. Charles Stewart South 오른쪽 능선 끝이 Lady McDonald
정상의 랜디와 저스티스. 배경 산은 런들 마운틴. 오른쪽 짤린 산이 캐스케이드.
쓰리 씨스터즈와 캔모어

 

안부에서 걸리로 내려선 길
랜디와 저스티스를 처음 만난 지점. 경사가 급해 보이지 않지만 저스티스 밑으로 빨간색 모자를 쓴 랜디가 얼마나 작게 보이는지 보면 높이를 알 수 있다.
나중에 사진 중앙 맞은편 벽을 기어 올라갔다.

 

아래 랜디가 넘어가려는 바위가 가장 위험했다. 랜디 왼쪽으로 약 6m의 건폭이었다. 저기를 넘어서고 난 후 오른쪽 경사를 올라 왼쪽의 벽을 기어 올랐다. 
왼쪽 사진 파란점에서 GPS를 확인하고 다음 확인한 지점이 빨간점. 오른쪽 사진은 내가 내려온 대략의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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