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이제 완연한 가을색이다.
공원의 잔디는 누렇게 변해가고 가로수들은 각기 옷 색깔을 바꿔 입었다.
아침저녁으로 얇은 카디건이라도 걸치지 않으면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산에는 벌써 눈이나 오지 않았는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세상은 좁고 할 일은 없는데 왜 이렇게 록키는 넓고 가고 싶은 산은 많은지 모르겠다. ㅋ
여기는 요즘 물가와의 전쟁이다. 우선 석유가가 내가 이민 온 이래 최고가로 치솟아서 고공행진을 하며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러니 다른 물가가 요동을 치는 건 당연한지 모르겠다. 근데 이 기름값이 비싸지니까 산에 가는 비용도 당연히 늘었다. 거의 서울 부산 왕복하는 거리의 산행을 하다 보니 하루 기름값만 80불을 넘겨 써야 해서 산에 자주 가는 것도 눈치 보인다. 물론 나한테. ㅋㅋ
그렇다고 산에 안갈 수도 없고 이번 가을에 꼭 가보고 싶은 산을 추리고 추려서 세 개의 산을 선택했다. 고르고 나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2,500m대의 산이었고 재스퍼, 데이비드 톰슨, 캔모어 각 지역별로 하나씩이었다. 아무래도 추위가 북쪽에서 시작하니까 눈이 내려도 북쪽이 먼저 내릴 것 같아 우선 재스퍼에 있는 산부터 가기로 했다.
이번에 간 산은 로체 본홈(혹은 로쉬 본홈 Roche Bonhomme). 일명 Old Man Mountain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산 정상부의 생김새가 사람의 옆얼굴을 닮아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한다.
자스퍼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니 눈에 들어오는 봉우리들 마다 머리에 하얀 꼬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걱정한 대로 산에는 벌써 눈이 내렸다. 지난 미드나이트 픽 산행 때 정상 바로 밑에서 10여 미터를 정신없이 미끄러졌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몸이 먼저 긴장하는 듯하다. 산행 시작할 때 아이젠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 말린 캐년 주차장에 도착했다. 4년전 초등학교 동창들 11명이 단체 관광을 왔을 때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음 일정인 뱃시간에 쫒겨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에 앉아 기다리던 곳이다. 다시 한번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픈 후회와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아있는 장소다,
차에서 내리니 벌써 공기가 싸늘하다. 아이젠을 찾으니 안보인다. 차 안에 늘 싣고 다니는 잡다한 등산 장비를 보관하는 더플백 안에 있을 줄 알았다. 만약을 위해서 털모자와 겨울용 장갑을 챙겨 온 게 그나마 다행이다.
산행 시작 지점의 숲속길은 아주 낭만적이고 좋은 느낌이었다. BC(British Columbia) 쪽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드리가 넘는 나무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걷다 보니 오른쪽에 물이 흐르지 않는 작은 계곡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계곡이 점점 깊어지면서 물이 흐르고 양쪽으로 바위의 단애를 이루는 멋진 캐년으로 변해갔다. 산행 루트는 그 캐년의 왼쪽 낭떠러지 위를 따라 올라간다.
밥 스퍼코(Bob Spirco)의 산행기에 의하면 이 로체 본홈이 그의 몇 번째 산행이었는지는 몰라도 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파른 경사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았다. 물론 아주 가파른 구간이 있었지만 4-50 미터를 오르면 다시 완만해져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처음 바위 지대가 시작했을 때 바위 옆을 오르는 숲 속 길은 진짜 가파랐는데 아마도 밥이 말한 가파른 경사가 여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흙길이었고 최근에 세 번 연달아 험한 산행을 해서 그런지 그다지 힘든지 모르고 올랐다. 아니 오히려 더 피치를 올려서 숨이 턱에 차도록 꼭 40분을 올라갔다. 이런 길을 천천히 걸으면 자칫 지루하고 더 힘들게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수목한계선을 지나고 정상부 바위 밑에 왔을 때 윈드자켓 안에 패딩을 하나 더 껴 입고 털모자와 겨울 장갑으로 바꿔 끼었다. 경사는 급했지만 짧고 쉬운 스크리 지역을 지나 작은 바위 스크램블 코스를 두 손 두발로 기어오르니 정상부 능선이었는데 제법 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정상부 능선은 바윗길인데 눈만 없으면 그다지 위험할 것 같지 않았지만 눈이 쌓여서 한발 한발 조심해서 디뎠다.
검은 구름이 잔뜩낀 흐린 날이었지만 다행히 조망이 나쁘지 않았다. 경치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올 초 첫 산행했던 시그널 마운틴과 스카이라인 트레일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정상부 릿지는 생각보다 길었다. 바람이 세지는 않았지만 무지 차가웠다. 릿지에 쌓인 눈이 언제 내린 건지 포실포실한 신설이 아니고 표면이 살짝 얼어 있어서 눈 위를 걸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
정상인 줄 알고 동영상을 켜고 오른 곳이 False summit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Real summit으로 한 20여 미터를 내려갔다 올라가야 하는데 눈이 쌓여서 내려가는 길이 확실치 않았다. 그나마 내려갈만한 길의 눈을 스틱으로 찔러보니 표면이 얼어서 스틱이 들어가질 않는다. 아이젠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첫발을 좀 강하게 차면서 디뎠는데 무릎까지 쑥 빠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눈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그대로 눈을 헤치고 내려와 마침 안부에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작은 돌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어 눈을 털었다.
정상의 케른(Cairn)은 사람 키만큼 아주 컸다. 이렇게 큰 케른은 전에 오팔 힐(Opal Hill) 정상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재스퍼고 같은 말린 레이크 지역이다.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큰 케른은 못 본것 같다.
케른 발치에 있는 예쁜 분홍색 탄약통 안의 레지스터 노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빈 페이지가 하나도 없었다. 이름 석자라도 적어 넣을 공간을 찾느라 꼼꼼히 들여다 보니 대략 2017년부터 기록이 시작된 것 같았다. 그런데 한글 혹은 한국 사람 이름인 것 같은 영문 표기도 없었다. 밴프 쪽 산을 가면 어느 산을 가나 더러 한국 사람의 이름들이 보인다. 아마도 그 사람들 대부분이 캘거리 산악회 사람들일 건데 여기 재스퍼까지는 멀어서 안 오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들 뿐이 아니라 재스퍼로 산행 오는 사람들이 드물다. 오늘도 이 산 전체에는 오롯이 나 혼자였을 게 틀림없다. 암튼 이름을 적으면서 혹시 내가 한국 사람으로서 이 산에 초등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자랑스럽게 안 쓰던 글까지 남겼다. 혹시 궁금하신 분은 직접 올라가 확인하시길... ㅋㅋ
정상은 사람 얼굴 형태의 이마에 해당된다고 한다. 계속 능선을 따라 비슷한 높이의 코와 턱의 봉우리가 이어지는데 너무 춥고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코와 턱의 탐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줄곧 오르막이었으니 내리막은 쉽고 빨랐다. 4시간 오르고 2시간 내려가고 정상에 20분 머물렀다.
코와 턱은 못 갔지만 대신 눈 때문에 시간을 지체한 걸 계산하면 밥(Bob)의 산행 시간과 비슷했다.
인터넷을 통해 찾은 산인데 정말 좋은 산을 발견했다. 어쩌면 나의 최애 산이 될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스릴도 있어서 너무 재미있는 산이었다.
후기를 쓰면서 Roche가 들어간 이름의 산들이 큰 바위산인게 많아서 혹시나 roche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로 rock이라는 뜻이 아닐까 찾아보니 역시 프랑스어로 바위라는 뜻이었다. 그렇담 로쉬 본홈도 바위산이라는 뜻인데 재스퍼 입구에 있는 Roche Miette이나 Roche Perdix 같이 산 전체가 바위산 같다는 인상은 못 받았다. 아마도 정상부 전체가 눈에 덮여서 바위라고 느끼지 못한 건 아닌지 다음에 오면 확인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가을이 오는 듯 싶더니 벌써 겨울이 온 모양이다. 올해 안에 딱 두 번은 더 가고 싶은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심수봉 누님이 노래를 부른다.
가을아~ 가~을~
오면 가지 말아라~
가을~ 가~을~
내맘 아려나~~
그대 사랑 가을 사랑~~~
(가사를 확인하느라 인터넷을 찾아보니 신계행이라는 가수가 부른 '가을사랑'이라는 노래였다. 암튼 내 엠피쓰리는 심수봉 누님이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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