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후기

Big Sister (2021년 8월 29일)

진승할배 2021. 9. 8. 17:02

토요일 밤 9시쯤 잠자리에 들면서 좀 일찍 잠들 수 있을까 싶어 책을 한 권 들고 침대에 누웠다.(난 책만 읽으면 잔다. ㅋ)
지난 수요일 도서관에서 빌려온 다섯권의 책 중 하필이면 기자 출신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쓴 여행기를 골랐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잠들기 전에 가벼운 여행기를 읽어서 빅씨스터라는 위험하다고 소문난 산행을 앞둔 전날의 긴장을 풀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근데 이 책이 은근 재미가 있었다. 작가가 1999년 부터 2002년까지 순전히 도보로만 12,000km의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쓴 '나는 걷는다'의 후속 편으로 그림과 함께 쓴 실크로드 여행 스케치인데 프랑스 할배의 글 솜씨가 좋아서 두 시간을 후딱 보내고 말았다. 

책 덕분인지 잘 자고 일어났다. 컨디션도 좋은 것 같았다. 근데 록키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오늘따라 유난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캔모어 시내를 관통하면서 빅씨스터의 톱니바퀴 이빨 같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부분을 노려 보았다. 오늘의 Crux라고 한다. 

주차장엔 딱 한대의 차가 있었다. 없는 것 보다야 낫다고 생각했다.
3,000m 가까운 산(2,934m) 발치에 차를 세웠으니 처음부터 얼마나 가파르겠는가. 입구에서 길을 잘 못 들어서 약 15분을 까먹었다.
트리라인 가까이 왔을 때쯤, 뒤에서 소리가 들려 젊은 친구들이 따라오나 보다 했는데 바위 시작 지점에서 쉬고 있을 때 나타난 두 사람은 나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들이 쉬지도 않고 인사만 하고 나를 지나쳐갔다. 

가파른 바윗길 첫번째 렛지가 나타났다. 약 2m쯤 높이인데 바닥에 돌을 쌓아 발받침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 해도 첫발 올려 딛기가 쉬워 보이지 않았다. 돌 받침 위에 올라서 손으로 이리저리 바위를 더듬다 보니 기가 막힌 홀드가 잡혔다. 쥐는 순간 마치 버스 의자에 붙은 손잡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홀드가 없었다면 그 자체로 3급 중반의 볼더링이었을 건데 그 홀드 하나로 2급대로 추락한 쉬운 바윗길이 되었지 싶다.
그 뒤로 공룡의 등뼈 같은 바위를 타고 오른다. 좌우로 낭떨어지지만 별로 위험을 느끼진 못했다.
산행 전 조사한 바로는 이길 어느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고 했다. 오른쪽 벼랑을 주시하면서 걷는데 나보다 50m쯤 앞서 가는 두 노인네는 오른쪽으로 내려서려는 게 아니고 오히려 가파른 슬랩을 왼쪽으로 비스듬히 타고 오르고 있다. 잠시 망설였다. 저 노인네들을 따라가야 할지 내가 조사한 대로 오른쪽으로 내려서야 할지. 그때 마침 오른쪽에 침니처럼 내려설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그렇지만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한 7-8m쯤 높이는 돼 보이는데 처음은 괜찮은데 마지막이 어떨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런 통로가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인네들을 따라가기도 그랬다. 저들이 그대로 직등을 하다 암벽 장비를 꺼내서 암벽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려서기로 했다. 반은 잘 내려왔다. 3m쯤 남겨놓고 오버행이다. 홀드도 확실한 게 없고 스탠스는 전혀 없어 보였다. 뛰어내리기에는 높았고 겁났다. 두 팔로 몸을 버티고 밑을 내려보니 벽안 쪽으로 발이 닿을 듯도 했다. 몸을 크게 활처럼 제쳐서 발을 내리니 그런대로 힘을 줄만큼 디딤이 되었다. 그렇게 내려서고 나니 동영상으로 본 오늘의 크럭스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근데 내려서서 5m쯤 올랐을까 거기에 아주 쉬워 보이는 통로가 있었다. 잘 못 내려온 거였다. 하산 길에는 그리로 올라갔다. 

바윗길 밑은 Talus와 Scree가 섞여 있는 지독한 경사의 자갈길이다. 정말 최악이었다. 바윗길 바로 밑이 더 미끄러워 오른쪽 벼랑으로 가까이 걷는데 멀쩡한 돌을 디뎠는데도 돌이 무너지면서 돌과 함께 주루륵 미끄러진다. 절벽 앞에서 겨우 멈춰서 일어나길 세 번쯤 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바위 밑으로 붙어 걸었다. 거기서 진짜 힘을 많이 소비했다. 두세 번쯤 미끄러지고 한 발을 안 미끄러지고 올라 서면 마치 두더지 잡기 놀이를 할 때 두세 번 헛방 치고 정통으로 두더지 머리를 내려칠 때처럼 '야호' 소리가 절로 나왔다. ㅋ 

스크리 지역이 끝나갈 즈음에 왼쪽으로 나아갔던 노인네들이 내 앞쪽 100m 앞에 나타났다. 이 스크리 지역이 최악인걸 미리 알았던지 머리 위의 가파른 바윗길을 왼쪽으로 우회해서 스크리 지역을 피한 거였다.(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위는 인수 대슬랩 처럼 슬랩이다. 여기 바위질이 까끌까끌한 사암 성분이라 그냥 걸을 수 있지 인수암처럼 반질반질한 화강암이었으면 암벽 장비 없이 오르기 쉽지 않은 산이었을 것 같다. 몇 개의 록밴드가 더 있고 왕모래가 뿌려진 미끄러운 슬랩을 올라서면 마침내 크럭스가 있는 지점에 올라선다. 

헬멧 위의 카메라를 켜고 막 크럭스가 있을만한 바위 끝 지점으로 다가서는데 불쑥 어떤 여자가 벼랑 끝에서 올라온다.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인도나 하와이 쪽 여자처럼 까무잡잡한 인상 좋은 젊은 여자가 솔로로 산행을 하는가 보았다. 여자에게 길을 묻고 바로 크럭스로 내려섰다. 높이는 좀 되었지만 이미 오버행을 내려온 나다. 스탠스도 많고 적당한 홀드도 많다. 크럭스는 무슨 크럭스. 속으로 '이지 베리 이지' 그러면서 내려왔다. 
마지막 돌길은 아주 가파랐지만 다행히 흙길이었다. 가팔라서 돌이 다 쓸려 내려갔나 보다. 왼쪽이 낭떠러지여서 오른쪽 바위로 붙어 걸었다. 마지막 큰 바위 하고 정상 능선 사이에서 먼저 올랐던 두 노인네를 만났다. 나보다 1시간은 빠를 것 같았다. 근데 앞서 내려오는 노인네가 서서 걸어도 될만한 바위에서 주저앉더니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온다.
나이를 물어보니 둘다 쉬흔여덟이란다. 난 예순셋이라 하니 'Good for your age' 그러는데 칭찬인지 네 똥 굵다 인지 모르겠다. 말 나온 김에 자랑삼아 2주 전에 템플 마운틴 갔던 거부터 등산했던 몇 개 험한 산 이름을 대며 잘난 체를 했다.
여지껏 한마디도 없이 뒤에 섰던 친구가 나한테 친구 없이 늘 혼자 다니냐고 묻더니 우리 같은 나이인데 같이 다니지 않겠냐고 물으면서 자기 연락처를 줄 테니 나중에 연락하라고 한다. 이름은 Dan이고 캘거리 산다고 한다. 집에 오자마자 메시지를 남겼는데 기회가 되면 같이 산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려올 때 그 노인네가 앉은 걸음으로 내려온 바위에 와보니 내가 섰던 바로 뒤 왼쪽이 굉장히 큰 낭떨어지였다. 그런 낭떠러지를 보면 사람이 겸손해진다. 나도 바로 주저앉았다. ㅋㅋ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산불도 다 꺼졌는지 연기도 하나 없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템플 마운틴을 오늘 갈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정상에 오후 2시25분에 도착했으니 4시간 45분이 걸린 셈이다. 오늘은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스크리가 문제다. 정상에 40분을 머물렀다. 경치 죽인다. 정상 능선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바로 발아래가 절벽인걸 인식하고 다시 겸손해졌다.
정상 노트에 '으라차차 Korea' 한줄을 써넣었다. 정말로 우리나라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으라차차 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하산길도 느렸다. 아무리 까끌까끌한 사암이라도 인수 대슬랩만한 가파른 슬랩을 거꾸로 내려오는 게 쉽지 않은 법이다. 자꾸 겸손해진다. 스크리 지역도 중간에 바위 슬랩이 섞여 있어서 바위가 나타나면 점프를 할 실력 정도가 돼야 자갈 스키를 탈 수 있는 더블 블랙 다이아몬드 코스다. 난 실력이 안돼 조신하게 내려왔다. 

이번 산행 후 산에 대한 정보를 찾다 어떤 친구가 쓰리 씨스터즈 각 자매의 이름이 Faith, Hope, Charity라고 쓴 글을 보았다. 그리고 우연히 지도를 확대해 보니 지도에도 각각의 봉우리에 위의 이름의 Peak으로 구분되어져 있는 걸 알았다. Faith Peak. Big Sister의 이름이다. Faith라... 연세 많으신 맏언니 할머니에겐 어떤 faith가 있는지 몰라도
나에게 하나 확실한 믿음은 앞으로 헬맷 쓰는 산행은 다시 말해 위험한 산행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거다. 그렇지만 길고 힘든 산행은 더 있을 거라 생각된다. 당장 다다음주엔 캐스케이드(2,998m)를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캔모어 시내에서 본 Big Sister의 크럭스 부분

 

수목한계선

 

보기엔 그래도 돌받침이 있어서 생각보다는 쉽다.
내려선 침니

 

내가 내려선 침니와 그 위의 정상 루트

 

 

 

 

 

Crux

 

 

 

Crux

 

 

 

 

 

지난 6월 힘들게 올랐던 림월이 한참 발 아래다. ㅋㅋ
7월에 올랐던 로렌스 그라시. 중앙 왼쪽의 제일 높아 보이는 봉우리는 런들 그너머 오른쪽이 캐스케이드.

 

 

 

쓰리 씨스터즈 둘째와 막내. 둘째의 능선 위로 트레일이 확연하게 보인다.

 

크럭스 위에 있는 네명중 왼쪽 커플은 거기까지였고 오른쪽 두명이 조 위에 사진중 크럭스를 내려오는 청년들이다.
어떤 친구가 포인터 종의 개를 데려왔는데 개가 스스로 몇번 시도하다 포기했는데도 저 친구가 기어코 안아 올려 끌고 올라갔다. 그 개도 정말 대단했는데 무사히 산행을 마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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