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 Rae (2022년 9월 4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에 하필이면 서쪽하늘 지평선 끝에 몇 조각의 구름이 모여 띠를 이루고 있다 그 띠구름이 지는 석양빛을 받아 마치 황금색 실과 빨간색 실로 자수를 놓은 듯 눈부시게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고 있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운 작품을 볼 수 있는 건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전이다.
지난 주간엔 앨버타 지방 소도시를 오가는 야간 트립을 했다. 한 밤중 시골길 위에서 보는 밤하늘은 어려서 평상에 누워 별자리를 찾던 그 하늘과 너무나도 닮았다.
가을 들녘에는 추수가 한창이다.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평원에서 집채 만한 트랙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밀이거나 귀리를 추수하는 장면은 장관이다.
가을색이 완연하다. 하지만 에드먼턴은 이상 기온으로 9월인데도 한낮에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한창이다.
새벽 4시 반 기온 14도에 출발했는데 아침 8시 반 2200m 높이의 하이우드 패스에 도착했을 때도 13도였다. 다른 해였으면 혹시 눈이 오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게 정상이었을 것이다.
가고 싶은 산이 많은 나는 행복하다. 오늘도 두 산을 두고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했다. 점점 추워지는데 눈이 오기 전에 높은 산(3218m)부터 가야 할지, 점점 해가 짧아지는데 산행 시간이 긴 산(11시간)부터 가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지난주와 같은 이유로 하이우드 패스로 다시 왔다.
마운틴 래(Mount Rae)는 내가 올라간 산 중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알란 캐인의 Moderate 평가는 공정하다. 아주 높은 낭떠러지의 릿지를 가지고 있지만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다만 스크리는 최악이었다.
산행을 시작할 때 내 앞으로 5명의 젊은이들이 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배낭에 헬맷을 매단걸 보니 같은 산을 가는 것 같은데 반갑지가 않았다. 언젠가도 말한 거 같은데 나는 산행 중에 다른 여러 팀에 뒤섞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게 불편하다. 나는 거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몸을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작은 체구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산행할 때는 나만의 방식으로 산행한다. 조금 느릴지언정 꾸준하게다. 그래도 경험상 남들보다 늦지는 않다. 보통 사람들은 산행에서도 평지 걷듯이 빠르게 걷고 숨이 차면 아무 때나 멈추어서 쉬고 숨이 돌아오면 또다시 빨리 걷는다. 나는 산행할 때 조금 천천히 걷지만 결코 숨이 아주 가쁘게 걷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 시간쯤은 쉬지 않고 걷는다. 그게 록키의 큰 산에서 오래 걸을 수 있는 비결임을 몸으로 깨달았다. 물론 빨리 걷고 숨도 덜 가쁜 능력자들도 있지만 그런 프로 산꾼들은 예외로 하자. 오늘도 그런 경우가 반복되었다. 5명의 젊은이들은 금방 산속으로 사라졌다가 20분 만에 쉬고 있었다. 뒷모습이 젊은이들인 줄 알았는데 지나칠 때 보니 프랑스(?) 말을 쓰는 사오십대의 아줌마 부대였다. 그들은 자주 멈추어 쉬었고 어디선가 다시 내가 앞서서 부담스러운 꼬리를 달고 폭포까지 왔다. 거기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Mt. Rae Cirque Trail 반환점이었다.
헬맷을 쓰고 물을 마시고 눈치를 보며 그들이 앞서 가기를 기다렸다. 5명의 프랑스 여인 군단이 아주 가파른 스크리에 올라 붙었다. 난 좀 느긋하게 그들이 올라가는 걸 보고 있다가 뒤로 붙었다. 머리 위에서 우르르 우르르 돌 흐르는 소리가 난다. 두 번 낙석이 있었는데 큰 돌은 쿠당 쿠당 큰소리를 내면서 떨어져서 피하기 쉬웠는데 공깃돌 만한 작은 돌은 보이지도 않고 헬멧을 스칠 때는 총알이 지나간 듯 쎄~엥 소리가 난다.
헬맷 없이 머리에 맞으면 관통상을 입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여자와 거의 동시에 안부에 도착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또 그들이 앞서 올라가길 기다렸다. 안부에서 보이는 첫 번째 봉우리는 False Summit인데 이 봉우리는 왼쪽의 스크리 지대를 트레버스 해서 우회해야 했다.
지난 산행 후기 때까지 최악이라는 말을 수없이 써 왔는데 여기 마운틴 래의 스크리는 최 최악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어려운 스크리 지역을 만날지는 몰라도 아마도 록키 전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최악의 스크리가 될 것은 틀림없다.
금세 여인 부대를 따라잡았다. 그런데 여인 부대를 처음부터 앞서서 이끄는 리더가 걷기는 잘 걷는데 루트 화인딩이 잘 안 되고 있는 느낌이다. 능선으로 올라서야 될 때 스크리를 올랐고 스크리로 내려서야 할 때 능선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내가 정상부 능선에 올랐을 때 스크리에 있는 그들에게 소리쳐 능선으로 올라오라고 하고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부 능선의 우리가 올라온 쪽으로는 직각의 절벽이다. 하지만 능선의 바위길은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았고 우회길도 있었다. 굳이 꼽자면 두 군데만 주의하면 죽을 만한 데는 없었다. ㅋㅋ
정상의 경치가 생각보다 좋은 편이었다. 사진을 찍고 쓰레기로 가득 찬 레지스터 통을 열어 어디 이름 석자 적을 데가 있을까 뒤적이고 있을 때 여인 군단 중의 한 명이 올라와서 자기 부대의 다른 병사는 다 죽고 자기만 살아 올라왔노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면서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한다. 느닷없이 생판 처음 보는 여자와 하이파이브를 다 해 보았다. ㅋㅋ
한껏 폼을 잡은 그 여자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을 때 세명의 여자가 살아서 올라왔다. 먼저 올라온 여자가 귀신을 본 듯 기절할 듯이 놀란다. 다시 찍사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그들의 승전기 사진사가 되어야 했다.
그러고 같이 하산을 시작했고 안부에 내려왔을 때 아주 멀리 능선 아래 있는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무사히 귀환했으리라 믿는다.
첫 번째 스크리 지역을 다 내려와서 거의 폭포에 다다랐을 때 다리도 풀리고 긴장도 풀려서 그랬는지 아주 쉬운 돌길에서 미끄러지면서 팔꿈치로 땅을 찧었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오른쪽 팔꿈치를 부여잡고 잔자갈 위를 뒹굴었다. 뒹굴면서 과연 이게 60 넘은 노인네가 할 짓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몰려온다. ㅋㅋ
집에 돌아와서 등산화를 살펴보니 등산화 뒤축 오른쪽 구석이 찢어져 있었다. 지난주 티어위트와 마운틴 래 딱 두 번 신었는데 벌써 찢어진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깨끗이 닦아서 신발 가게로 들고 가 새것으로 바꿔왔다. 지금 우리는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친구가 아마존에서 물건을 샀는데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새것을 산 것 치고는 기분 나쁜 작은 하자가 있어서 아마존에 교환해 달라고 하자 새 물건을 보내 줄 테니 이미 받은 물건은 돌려보내지 말고 그냥 버리라고 해서 갑자기 두 개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신발도 아무리 두 번 만에 찢어졌다고 해도 소비자인 내 잘못도 클 텐데 두말 않고 바꿔준다. 그나저나 이번 산행의 스크리 지역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멀쩡한 신발 밑창이 다 찢어졌을까 상상이 가시는가? ㅋㅋㅋ



Cirque Trail 끝 이름 없는 폭포

Cirque 안부에서 Arethusa로 이어지는 능선.
Arethusa는 낮지만 Difficult 등급의 날카로운 릿지다.

오른쪽의 봉우리는 False Summit. 여인 군단 정면의 안부로 오른다.

가파른 스크리지대 시작

올라온 길

낙석이 심해서 헬맷은 필수다.

안부

안부의 반대편

정면이 False Summit, 왼쪽 먼 봉우리가 정상. False Summit 왼쪽으로 트레버스 해야 하는데 길이 너무 많아서 헷갈린다. 스크리는 최 최악.

여기서 오른쪽 능선으로 오르는 것보다 왼쪽의 렛지를 넘어 계속 스크리를 트레버스 해야 한다.

올라온 스크리

여기서부터 릿지로 올라서는 게 더 쉽다.

여전히 잘 올라오는 프랑스 외인부대

정상부 릿지

올라온 길. 보기엔 쉬워 보여도 길도 여러 갈래고 쉽지 않다.

정상에서 올라온 방향


올라온 방향

반대편

반대편

캘거리 방향


실제 높이는 3218m이다. 4시간 조금 안되게 올라왔고 3시간 조금 안되게 내려가서 전체 6시간 50분 산행이었다.



유일하게 조금 위험했던 릿지의 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