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 Nestor (2022년 7월 17일)
새벽 5시, 비가 내린다. 빗속에서 자전거를 실었다.
비 오는 날 설악산으로 산행을 떠나는 사람이 강원도 지역에는 비가 안 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일기예보의 카나나스키스 지역 날씨는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오후 2시경 1mm 미만의 비도 내린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 오히려 구름 낀 날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원주를 지날 때 쯤 비가 그치고 원통을 지나칠 때쯤 해가 나기 시작했다. 설악산에 도착했을 때는 말끔하게 개어있었다. 아니 카나나스키스에 도착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420km를 달려 도착한 체스터(Chester) 레이크 트레일 주차장은 닫혀 있었다. 멘붕!
오늘의 산행 예정지는 거스티 픽(Gusty Peak)이었다. 거스티 픽은 생김새가 마음에 든다. 바위산인데 유튜브 좋아요 버튼의 엄지 척 모습과 비슷하다. 3,000m의 산이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습에 비하면 쉬운 산이라 어디 가서 잘난 체하기 딱 좋은 산인데 기회를 잃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카나나스키스에 들어올 때 본 오팔(Opal) 릿지 North Peak. 그런데 기왕이면 자전거를 가져왔으니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데를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억해낸 곳이 Mount Nestor 였다. 다행히 Peak Begger 앱에 다운 로드를 받아 놓아서 루트 맵은 있었지만 얼마나 어려운지, 자세한 루트는 어떤지 전혀 공부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가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네스토 산으로 향했다.
네스토 산은 내가 주로 산행하는 쪽 스프레이 레이크 건너편에 있는 산이라 쓰리 씨스터즈 댐을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이 길이 왠지 낯이 익다. 댐을 건너 트레일 헤드 주차장에 도착해서 빨간색 지하수 펌프를 보았을 땐 데자뷔 같은 느낌이 들어 머리털이 쭈삣 서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왔던 곳인데 전혀 기억에는 없었다. 옛날에 왔다한들 그때는 이 근처에 있는 산을 갈 실력도 안되었고 그런 산을 올라간 기억도 없었다. 내가 착각을 하는가? 혼란스러웠다.
호수 옆으로 비포장 길이 계속 이어진듯 보이고 바리케이드도 없어서 차가 들어갈 수 있어 보였지만 캠핑장 이용객만 들어갈 수 있다는 안내문이 있고 큰 간판에 "Trail Head Parking Lot"이라고 쓰여 있어서 그곳에 주차해야 되나 보다 생각했다. 자전거를 내리고 비포장 길로 들어서서 호수 쪽으로 늘어선 캠프 그라운드를 따라 15분쯤 달리니 바리케이드가 나오고 거기에 주차장이 하나 더 있었다. 멘붕! 집에 와서 네스토 산을 검색해 보니 캠프그라운드를 지나 이곳에 주차하라고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었지만 공부 안 한 대가가 컸다. 여기까지 대체로 내리막이라 신나게 달려왔지만 돌아갈 때는 여기서 죽을 고생을 했다.
바리케이드를 지나 풍광 좋은 호수의 서쪽 호안을 신나게 달리는 중에 곰의 똥을 두 번이나 보았다. 그 때야 곰 스프레이를 안 가져온 게 생각났고 이제 곰에 대항할 무기는 오직 큰 목소리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자전거 위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내달렸다.
내 자전거는 대체로 하산용이다. 여지껏 한 번도 산에 올라가면서 사용한 적은 없다. 맨 처음에 한 5분쯤 오르막에서 시도해 본 적은 있지만 그때 바로 걷는 다리 근육과 페달 밟는 근육이 다르다는 걸 알고는 더 이상 시도해보지 않았다. 오늘은 산으로 가는 길이지만 평지에 가까워 자전거가 진짜 유용했다. 딱 한번 읽어 봤던 가이드 북에서 산행 시작 지점까지 40분을 라이드 한다고 했던가 1시간을 라이드 한다고 했던가 긴가민가 하면서 달린다. 산행 시작 지점을 작은 케른으로 알아차리기보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고 했는데 역시 공부를 안 해서 헷갈린다. 리본이었나?
53분을 달려 산행 출발점으로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말대로 작은 돌 무덤은 보이지 않고 주홍색 리본만 두 개 보인다. 역시 한번 본 책이지만 잘 기억했다고 스스로에게 칭찬한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와서 가이드 북을 찾아보니 개뿔 무슨 리본! 호수 쪽으로 난 하수 설비(Drainage) 였는데 그런 건 보지도 못했고 꿈도 못 꿨다. 설명을 해놔도... 참!
아무튼 출발점은 제대로 찾은거 같은데 시작부터 가파르다. 모기 때가 달려드는 걸 보니 여름인 게 실감이 난다. 능선길로 이어질 것 같은 산길은 걸리(Gully)라고 불리는 가파르지만 우묵한 계곡으로 이어진다. Gully 초입의 풀밭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을 이루고 계절을 자랑하고 있다. 이 걸리는 익스트림 스키를 즐기는 스키어들의 할강 슬로프로 쓰인다는 Hero Knob의 The second gully랑 너무나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도 겨울철엔 익스트림 스키어들이 즐겨 찾는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밭을 지나면 Bob이 그의 가이드 글에서 Loose rock이라고 표현한 스크리(Scree ; a mass of small loose stones that form or cover a slope on a mountain.)와 테일러스(Talus ; large, loose broken stones on the side of a mountain, or an area covered with stones like this:)의 혼합 너덜지대로 이어지고 이런 길이 정상까지 계속되어 정말 지치고 힘들게 만든다.
어느 가이드 글이나 이런 스크리 지역이 나오면 반드시 slogging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데 사전적 의미 그대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다, 고생하며 나아가다.' 이기 때문이다. 또 돌길이다 보니 산길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 Bob의 표현대로 Vague(1. 모호한 2. 애매한 3. 희미한)한 흔적을 따라 아주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첫 릿지크레스트에 올라섰을 때 정상부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내가 올라선 릿지를 따라가면 끝에서 정상으로 올라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가파르게 보였다. 오히려 왼쪽에 길게 늘어선 능선이 정상에 어렵지 않게 닿을 것 같아 보여서 픽 베거의 루트맵을 찾아보니 역시나 내 위치 표시점이 루트 오른쪽으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왼쪽 능선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길이 안보였다. 경사도 굉장히 가파랐고 그 경사면을 따라 병원 창문에 흰 커튼이 드리워진 것 같이 흰 눈이 덮여 있어서 그 눈을 뚫고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저 릿지를 탔어야 했었나 보다고 생각이 들고 그렇담 산행 시작 지점부터 잘못 들어선 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든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눈앞의 능선 제일 높은 곳까지 가서 정상으로의 길이 없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혼자 산행 할 때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이다. 아니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악마다. 늘 달콤한 말로 그만두자고 꼬드긴다. 오늘 제일 달콤했던 유혹은 "너 오늘 이 산이 목표가 아니었잖아. 지금 루트 화인딩(Route finding)도 안되고 있어. 여기 올라가 봐야 정상엔 못 가. 그럴 바엔 여기서 그냥 포기해.'였다.
오늘은 정말 그 말에 넘어갈 뻔했다. 넘어 가고도 싶었다. 능선길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오른쪽으로는 가늠할 수도 없는 낭떠러지였다. 이렇게 위험한 구간이 있을 거라는 건 생각도 못했고 아침에 다른 산을 돌아왔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늦어져서 그때가 이미 오후 3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그래도 다행이 헬맷은 챙겼다. 픽 베거 앱에 갈무리해 놓은 산이 모두 스크램블 산행이기 때문에 쉽든 어렵든 헬맷이 필요한 산행인 줄 알았으니까.
역시 정상으로 연결된 올라갈 만한 길은 없었다. 멀리서는 눈이라도 없으면 혹시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눈이 없어도 록 클라이밍 아니면 올라설 수 없었다.
정상은 못갔지만 그렇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의외로 릿지에서 스릴도 느끼고 할 만큼 한 산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The return trip down the gully was uneventful although hard on the knees. The grade never gives up!"
하산길은 Bob의 마음과 하나도 다를게 없어서 그의 말을 여기 빌려 왔다. 엄살을 하나 더 붙이자면 울퉁불퉁한 돌길을 많이 걸어서 그랬는지 마치 족저 근막염에라도 걸린 듯 오른쪽 발바닥이 찢어질 듯 아픈 거였다.
갈 때 53분이 걸린 자전거 라이드는 돌아올 때 꼭 2시간이 걸렸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듯해서 자전거 페달을 밟을 수가 없었다. 비포장 길을 많이 타서 그런가 엉덩이도 너무 아팠다. 내리막 길에서만 엉덩이를 들고 타고 내리 걸었다. 물론 이때도 소리는 꽥꽥 지르고 있었다.
캠프 그라운드에 도착했을때 저 앞에 시커먼 물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직감적으로 곰인 줄 알았다. 마침 그때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야영장에 앉아 있는 사람을 불렀다. "곰이야!" 그런데 나를 한번 힐끗 돌아보고 자기 일을 한다. "진짜야! 저기 앞에 곰이 걸어간다니까!" 하면서 자전거를 세우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더니 도로로 올라온다. 그러더니 "오 마이 갓! 진짜 그리즐리 곰 이자나. 맙소사 내 마누라가 있었어야 되는데. 그 여자가 곰 보게 해달라고 빌었거든." ㅋㅋㅋ
나도 블랙 베어는 몇번 본 적이 있지만 그리즐리 곰은 처음 마주친 거였다. 근데 생각보다는 작았다.
잠시 후 캠핑장 관리인을 만나서 곰이 나타났다고 하니까 자기도 봤다면서 애기 곰이라 근처에 어미가 있을게 틀림없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너무 힘들어서 죽어도 못 넘을 것 같은 고개를 어떻게 넘었는지 모르겠다. 공부 안 한 덕분에 고생은 조금 더 했지만 그래도 곰을 봤으니 역시 공부 잘하는 놈만 잘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ㅋㅋ
최근 몇년 사이 오후 8시에 산행을 끝내긴 처음이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기어서 집에 들어왔다.
사족
산행 다음날.
빨간 펌프가 있는 주차장에서 내가 무슨 일을 했던가 추적을 하기 위해 우선 구글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근처에 Old Goat 마운틴이나 Mount Nestor 말고 다른 산행 루트가 있나 찾아보니 Old Goat Glacier Trail이 있었다.
언젠가 후기를 쓰면서 글레시어(빙하) 산행을 두 번 했던 거 같은데 93번 하이웨이에 있는 Stanley Glacier는 기억이 났는데 다른 하나의 빙하 이름이 생각이 안 났었는데 그 이름을 보고 아차! 이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먼턴 푸른 산악회 카페를 찾아 들어가 보니 내가 대장을 할 때인 2014년 8월 9일 총 17명의 회원이 약 6시간에 걸쳐 산행을 했다고 후기는 없지만 산행 일지를 써 놨던데 어떻게 그렇게 깜쪽 같이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