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후기

Rimwall Summit (2021년 6월 27일)

진승할배 2021. 7. 1. 14:28

결국 딸라 변을 썼다. ㅋ
아주 비싼건 아니더라도 모처럼 맘에 꼭 드는 등산화를 찾았다. 여기선 쉽게 찾기 어려운 W 창이고 고어텍스 기능을 갖춘 (요즘은 상표 등록법 때문인지 고어텍스라는 용어를 못쓰는 거 같다) 내겐 과분한 신발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더니 새 신이 생기니 빨리 산에 가서 신어 보고 싶어 졌다. 
새 해머를 사면 멀쩡한 바위를 쪼사서 홀드라도 하나 만들고 싶은게 사람 심리이고 새 크래터 슈즈가 생기면 빨리 인수로 달려가고 싶었던 아련한 시절도 떠오른다. 

핑계 김에 일주일 만에 또 산에 가게 되었다. 이렇게 뻔질나게 산에 가는 나를 보고 어떤 친구가 산하고 데이트하는 가 보다고 하는데 딱히 부정할 말은 아닌 듯싶다. 

새벽에 지하차고에서 나오니 훤하게 밝은 남쪽 하늘에 하늘보다 더 밝은 하얀 달이 오른쪽 가장자리가 덜 찍힌 도장처럼 하늘 한가운데 꾹 찍혀있었다. 구름도 한점 없는게 날이 무척 더울 모양이다. 

오늘도 고속도로에 접어들고나서야 모자를 두고 온 걸 알았다. 시계하고 보조 배터리 챙기는 것만 신경 쓰다가 정작 중요한 모자를 놓고 왔다. 오늘 햇볕이 무지 뜨거울 텐데... 할 수 없이 레드디어의 주유소 편의점에서 15불짜리 싸구려 모자를 하나 구입했다.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다. 쉬이 잠들지 못했고 한 밤중에 시끄러운 소음에 깼다. 층간 소음이 아니고 옆집 소음. 젊은 커플이 싸움이라도 하는지 베란다에 나와서 큰소리로 다투는 바람에 깨서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겨우 3시간쯤이나 잤을까? 빡빡한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5시에 출발했다. 

올초에 김준회가 올해부터 카나나스키스 지역도 입장료를 받는다는 기사를 봤다고 알려주었는데 오늘 카나나스키스 심장부로 들어가는데 입장료 받는 곳이 없었다. 계획은 있는데 아직 시행은 안 하는 모양이다. 
캔모어에서 카나나스키스로 들어가는 742번 도로는 정비를 안하는지 도로 상태가 나빠서 많은 차들이 엉금엉금 기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아침 9시 30분인데도 림월 트레일 입구 갓길에는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차가 많았다. 이곳은 윈드타워 산행 시작 지점과 같은 곳인데도 따로 주차장이 없다. 윈드 타워는 올 가을쯤 등반할 예정이다. 

픽 베거(PeakBegger)의 림월 루트맵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산행기를 보면 림월을 올라가는 다양한 루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작하자마자 갈림길이 나왔는데 나는 주저 없이 가파르지만 능선길인 왼쪽을 택했다. 오른쪽 길은 계곡으로 해서 웨스트 윈드 패스로 올라가는 길 같았는데 결국 같은 높이를 올릴 거면 힘 있을 때 처음부터 높이를 올리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가파르지만 그런대로 트레일은 좋은 편이었다. 새 신발이라 그런건지, 신발 바닥이 좋아서 그런지 마사토의 흙에서도 바위에서도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신발 속의 통풍 발가락까지 안 아프게 해 주는 건 아닌 모양이다. 통풍이란 놈이 참 고약한게 운동을 많이 하면 더 안 좋다고 한다. 특히 많이 걷는 건 통풍에 아주 나쁘다고 한다. 지난주 좀 많이 걸은 게 안 좋았는지 다시 발가락이 우릿하게 아프다. 

첫 번째 산마루에 올라설 때까지는 좋았다. 그 위의 수목한계선까지도 좋았다. 그리고 그 위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쯤에서 내가 지나쳐 온 두 팀은 포기하는지 목소리가 멀어졌다. 바로 머리 위 가까운 데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고개를 한껏 젖혀서 쳐다봐도 보이질 않는다.
스크리 지역은 이제 좀 익숙해 질만도 한데 좀처럼 친해지질 않는다. 눈으로 보기에 바로 머리 위가 정상 같은데 픽 베거 맵으로는 아직도 정상은 한참 멀리 있는 걸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예닐곱의 남자 무리가 앉거나 사진 찍고 있는 정상(?)에 올라 서며 "This is it?"이라고 한 친구한테 물으니 그가 턱으로 저 멀리의 봉우리를 가리킨다. 픽 베거 맵의 비밀이 이거였다. 난 이제 겨우 정상부 능선에 올라선 것뿐이다.
교회 청,장년부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면 딱 좋을 예닐곱의 필리핀 친구들은 여기까지라고 하는데 정상을 코 앞에 두고 안 갈 수가 없어 그들과 헤어져 정상으로 향했다. 

밑에서 보기에 별거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갈수록 태산이다. 너무 지쳐서 아니 너무 졸려서 그냥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볕 아래 트레일 위에 대자로 누워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꿈속인 듯 헬리콥터 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어이!(진짜 어이! 그랬다)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서 일어나 앉으니 내 나이 또래의 캐나다인 영감탱이가 무례하게 나를 깨운 소리였다. 물론 자기도 트레일 한 중간에 사람이 죽은 듯 누워 있었으니 놀랄 만도 했겠지만 내가 너무 피곤해서 잠깐 잠이 들었다고 사과했는데도 그 이후로 나하고 지나치면서 말 한마디 안 한다. 그때 마침 헬기가 내 위로 지나가고 있었던 건지 쓰러진 나를 보고 내 위에서 맴돌았던 건지 헬기가 정상 너머로 날아가는 게 보인다. 입이 댓 발만큼 나왔던 캐나다 늙은이도 헬기 따라 정상으로 향한다. 시계를 보니 한 20여분쯤 잘 잔거 같다. 

정상 바로 밑의 스크리 지대는 돌이 굵어져서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경사가 급한 렛지(록밴드)를 넘어야 하는 건 살 떨리게 만든다. 하나 둘 세개 쯤 점점 높아지는 렛지를 올라서니 정상이 보인다. 성질 급한(안 봐도 뻔하다. ㅋ) 영감탱이는 벌써 하산 중이다. 

13시 25분. 2,680m. 드디어 정상이다. 9시 40분에 산행을 시작했으니 3시간 45분 걸렸다.
내 시계와 앱의 높이가 실제 높이와 각각 다 다르다.
지난 주 시그널 마운틴 산행 때도 느꼈는데 삼성 앱이 한국에서 만든 거라 그런지 여기선 잘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 ㅋ.. 게다가 오늘은 자꾸 오작동을 일으켜서 시작하고 바로 앱을 꺼버렸다. 내 시계 높이로 916m를 올라왔다.
정상의 조망은 정말 일품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쓰리 씨스터즈 봉우리들의 뒷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건 압권이었다. 조만간 올라갈 봉우리들이다. 정상 레지스터 노트에 이름을 적어 기록을 남겼다. 

올라올 때부터 내려갈 때는 계곡 길을 택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픽베거 맵에 의하면 West Wind Pass로 내려서려면 정상 릿지에서 계속 일직선으로 내려오게 되어있는데 거기는 그냥 낭떠러지였다. 내려다보는 것만도 오금이 저렸다. 중간에 아주 좁은 테라스가 보이긴 했지만 테라스까지도 3-4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높이는 넘었다. 
아마도 밑에서 부터 올라오면서 보면 네발로 기어오르는 루트가 보일지는 몰라도 위에서 내려다봐서는 도저히 루트를 찾기가 불가능했다. 바위를 오르는 게 쉽지 거꾸로 내려간다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니까.
올라온 길 보다 더 왼쪽으로 붙어서 낭떨어지 끝을 따라 내려오다 거의 다 내려왔다 싶을 때 계곡 쪽으로 난 길을 발견하고 아주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 계곡으로 내려섰다. 너무 덥고 마실 물도 떨어져서 시원한 계곡물을 기대했다. 그러나 계곡에 물이 없었다. 원래 물이 있었을 것 같지 않은 바짝 마른 계곡이었다. 괜히 왼쪽으로 더 많이 돌았을 뿐이다. 혼자였기 망정이지 일행이 있었으면 원망만 들을 뻔했다. 결국 올라갈 때 루트 선택을 잘한 셈이다. 처음부터 West Wind Pass를 택했으면 겁이 나서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즌이 시작되니 여기 저기서 연락이 온다. 전에 같이 다니던 아줌마 부대한테서도 연락이 왔고 옛날 푸른 산악회의 갑장한테서도 문자가 왔다. 산에 같이 가자는 연락인데 솔직히 반갑지 않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가고 싶은 시간에 가는 게 좋다. 오늘같이 산행 중 졸리면 아무데서나 잘 수 있고 길을 잘 못 들어도 원망 들을 일도 없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싼지브에게는 올해는 산에 같이 못 가겠다고 벌써 말해두었다. 
올해는 제법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런데 벌써 석달을 쉬었으니 더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친구도 좋지만 이젠 말없는 산하고 데이트하는 게 더 좋은 나이가 되었나 보다. ㅋㅋㅋ

 

 

 

 

Spray Lake 건너편의 Goat Mountain과 Mt. Nestor(왼쪽)

 

 

왼쪽부터 Wind Tower, Mt. Lougheed9(가장 높은 봉우리), Wind Mountain, Mt. Bogart
처음에 저 위가 정상인줄 알았다.

 

필리핀 젊은이가 찍어준 사진. 저 뒤가 정상.

 

 

 

누군지 아실... ㅋ

 

공식 정상의 높이는 2,680m. 삼성 앱의 높이는 2,820m. 1,570m에 시작했으니 916m 올랐다.
왼쪽에서 두번째 연한 연두색 선이 내가 올라간 루트. 맨 오른쪽 끝선이 계곡길. 그 길의 끝이 West Wind Pass.

 

탄약통(?) 안의 풍경. 아마도 어린 친구가 올라와 자기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두고 간건 아닌지... 카우보이가 좋아한다는 FireBall이 있었는데 술도 조금 남아 있었다. 물론 난 안마셨다. ㅋ...

 

 

 

Three Sisters

 

올라온 반대쪽에서 본 정상

 

정상부 능선과 왼쪽 밑의 West Wind Pass. 패스에서 이어진 트레일 자국은 Wind Tower 올라가는 길.

 

동영상 속 음성은 삼성 앱이 지 멋대로 멈췄다 작동했다 하는 소리.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껐었는데 정상에서 높이를 재느라 다시 켜놓은거 같다.     저 신... 비싼 새신발인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