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w Lake ( 2021년 2월 21일 )
계절은 속일 수 없다더니 여기 동토의 땅 에드먼턴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초 영하 39도까지 내려간 날이 있었어도 지난겨울은 무난한 편이었고 봄도 조금 일찍 찾아오는 듯싶다.
길가에 쌓인 눈이 녹아 차들은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진창을 피해 조심조심 걷는다.
지난 두달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불면증을 겪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불면증에는 술도, 수면제도 소용이 없었다.
잠이 들기 힘들거나 잠이 들어도 자주 깨었고 하루에 4시간 많아야 5시간 자는 게 다였다.
일도 많지 않고 너무 편해서 그런가 싶어 뭔가 육체적인 노동이 필요할 거 같아 날이 풀리자마자 산으로 향했다.
지금의 록키는 한창 적설기다. 록키의 심장 레이크 루이스 스키 리조트의 오늘 눈 상태 리포트에 의하면 지난밤사이 22cm의 눈이 내렸고 시즌 적설량 최저 432cm 최고 514cm의 눈이 쌓였다고 한다.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눈이 적은 편인 듯싶다. 보통 이맘때의 리포트를 보면 최저 8m에서 최고 12m의 적설량을 보이는 게 보통이다.
암튼 스노우 슈 산행하기 딱 좋은 시기이다.
구글이 보내준 사진을 보니 3년 전 2월 4일은 우윤철이랑 Bow Fall 산행을 했던 날이다. 그 날은 윤철이가 서머타임을 잊고 늦잠을 자는 통에 출발도 늦었고 성격이 느긋한 윤철이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겨우 Bow Fall까지만 가고 내려왔던 날이다.
스노우 슈 산행하기에 보우 레이크와 그 주변을 빼놓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도 보우 레이크로 향했다.
이번에 목표는 캐나디언 알파인 클럽이 운영하는 보우 헛이라는 산장이다.
코비드로 올해는 정상운영을 하는지 모르지만 평소에는 예약제로 산장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보우 헛 산행 리포트를 찾아보니 등반 고도 약 700여 m에 4-6 시간의 산행이라고 하는데 적설 기인 요즘엔 6시간 내지 8시간은 잡아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해서 이른 새벽에 집에서 출발했다.
보우 레이크 옆 넘티자(Num Ti Ja) 랏지 주차장에 내리니 제법 강한 바람과 함께 눈이 내린다.
주차장에는 차가 여섯대 주차되어 있었다. 한대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관광객들 같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호수로 내려서니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너 잘 만났다 하고 행패를 부리듯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좀 더 중무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면서 그대로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다.
점점 바람이 세지고 눈보라가 앞에서 불어 와서 시야는 거의 볼 수 없을 지경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조차 어려워졌다.
늘 닥쳐야 대처를 하는 성격 탓에 호수 한가운데서 중무장을 갖췄다.
복면강도가 쓰는 것 같은 두건을 쓰고 고글을 끼고 장갑을 벙어리장갑으로 바꿔 끼었다. 그래도 기온은 겨우 영하 4도라 겨울용 티셔츠에 조끼 그리고 여름용 윈드재킷만을 입었는데도 추운 줄은 몰랐다.
호수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때 쯤에는 바람이 더 거세졌다. 돌풍이 불 때는 바람을 맞받고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돌아서서 주저앉았다. 돌아 서서는 혹시라도 나무 같은 게 바람에 날려와 나를 강타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느꼈다.
계속 가야할지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주차장에 차를 보면 넘티자 랏지도 문을 닫았는데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났다는 얘기이니 나라고 못 갈건 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냥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따라 걸으면 걷기가 쉬웠는데 어느 순간 그 길을 놓쳐서 스노우 슈를 신은 발이 2~30cm씩 빠져서 앞으로 나가는 게 더 힘들었다.
지난번 윤철이랑 왔을 때 호수 상류 지점이 완전히 얼지 않고 슬러시 상태였던 걸 기억하고 호수 왼쪽에 눈이 없이 덜 얼은 거 같은 곳이 보여 오른쪽으로 치우쳐 걸었다. 그러다 너무 빨리 산에 가까이 붙었는지 눈이 너무 깊었다. 걷는 게 점점 힘들어져 다시 호수 쪽으로 움직여 걷다가 갑자기 왼쪽 다리가 허벅지 끝까지 푹 꺼졌는데 느낌이 진창에 빠진 듯했다. 얼른 오른쪽 무릎으로 기어 나오니 왼쪽 신발에 잔뜩 슬러시한 얼음물이 묻어 있었다. 딱딱한 땅이 없으니 얼음을 털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또 빠질까봐 호수로 내려설 수 없어서 더 오른쪽으로 치우쳐 걷다 보니 막다른 계곡을 만났다.
말린 캐년 같은 폭이 좁고 깍아지른 절벽인데 그 밑으로 물이 콸콸 흘렀다. 이 물이 눈 밑에 호수 표면을 슬러시로 만든 것 같았다.
캐나다에는 겨울에만 열리는 윈터 로드라는게 있다. 그 길은 공식적인 루트라 지도상에도 표시된다. 대표적인 곳이 오로라 관광으로 유명한 엘로우 나이프라는 곳이다. 그레이트 슬레이브 레이크 북쪽에 있는 엘로우 나이프를 가자면 여름에는 그 큰 그레이트 슬레이브 레이크를 왼쪽으로 크게 돌아 올라가야 하는데 겨울에는 그 호수를 그냥 질러가는 윈터 로드가 생긴다고 한다.
여기 보우레이크도 그렇다. 겨울에는 호수를 가로질러 바로 보우 폭포로 갈 수 있지만 여름철에는 오른쪽 호안을 돌아 이 계곡 오른쪽으로 올라 고개 넘어 계곡 상류의 얕은 하천을 건너 보우 폭포로 갈 수가 있다.
난 오늘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작은 지능선 하나를 돌지 않고 이 계곡으로 들어선 꼴이다. 나에게 빽(Back)은 없다. 다시 돌아 나가기가 싫어서 계곡 왼쪽의 지선을 넘기로 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고 낮지만 가파른 지선을 스노우 슈를 신고 넘는다고 옷 속으로 줄줄 땀이 흘렀다. 30여분을 헤맨 끝에 다시 사람들이 다닌 흔적으로 돌아왔다.
땀이 식어 몸이 차가와졌고 신발이 얼면서 왼쪽 엄지와 검지 발가락이 시려왔다. 다행히 나무 숲 속이라 바람은 덜했다.
서둘러 보우 폭포로 가는 능선을 올라섰다. 능선 정상엔 다시 눈보라가 심해졌다.
능선에서 길이 끊겼다. 오른쪽 능선을 타고 내리면 아까 본 계곡 위로 가게 될텐데 그 길은 지난번 윤철이랑 갔다가 바위 사이에 빠져서 죽을 고생을 했던 길이라 정면의 가파른 사면을 비스듬히 타고 넘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길이 아닌 길은 가는게 아니다. 불과 10여 미터도 못 내려가서 오른쪽 다리가 허방을 짚으면서 급경사면에 거꾸로 처박혔다. 어떻게 떨어졌는지 오른쪽 팔과 폴은 몸통에 깔리고 오른쪽 다리는 들렸는데 왼쪽 다리와 스노우 슈는 눈 속에 깊이 박힌 듯했다. 어디 부러진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윗몸을 일으킬 수도 없어서 누운 채로 눈 속에 박힌 왼쪽 스노우 슈를 더 밑으로 끌어내리려 젖 먹던 힘까지 힘을 써야 했다. 겨우 몸을 돌렸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눈이 약해서 디디면 점점 더 경사면 밑으로 흘러내렸다. 잡으면 뚝뚝 부러지는 나무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기었다.
다시 능선에 서니 추위가 엄습한다. 그때 일군의 사람이 나타났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네명인데 크로스컨트리 스키처럼 스키부츠 뒤축이 들리고 알파인 스키보다 폭이 넓은 산악용 스키를 신었다. 스키 위에, 바인더 위에, 부츠 위에 서 있어서 인지 발목까지 눈에 빠져 있는 나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커 보여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올라가는 길인지 내려가는 길인지 물으니 조금 더 올라가려다 포기하고 내려간다고 나보고 더 이상 안가는게 나을 거 같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었다. 더 이상 힘도 없었다.
앞장서서 경사면을 쏜살같이 내려가는 스키어들을 따라 나도 뛰다시피 내려왔다. 제법 한 스키하는 나도 저런 산악 스키를 해 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산악 스키는 루트가 따로 없는 나무 사이를 타야 하는 데다 스피드가 있어서 상당히 위험하다. 저 친구들처럼 팀이 없이 혼자 한다는 건 자살행위와 같을 것 같아서 못하고 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도 하나 둘 줄여나가야 할 판에 무슨 새로운 걸 시도하겠는가.
다시 호수에 내려서니 강한 바람이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서 집으로 가라는 듯 강하게 등을 떠민다.
아까 올 때 덜 얼어서 눈이 없는 호수 표면 같은 곳이 오히려 잔자갈이 깔리고 눈이 없는 상류의 끝부분 호변이었다. 잘 알지 못하니까 파출소 피하려다 경찰서 만난 꼴이었다.
앞서가는 스키어들의 모습이 눈보라 속에 나타났다 없어졌다 한다. 겨울 산행을 하면서 눈이 오는 속에 산행을 한적은 많지만 이런 바람은 처음이다. 언젠가 일본인 우에무라 나오미가 남극인지 북극을 횡단하고 쓴 책에서 읽었던 한치 앞도 안 보인다는 블리자드가 이런 거가 아닌지 혼자 북극해를 건너는 기분에 취해 바람 속을 걷는다.
피에쑤
어제는 저녁 늦게 심주택씨 부부가 놀러 와서 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산행의 뒷끝이라 잠도 아주 달게 많이 잘 수 있었다.
누구 말 마따나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