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 Rundle ( 2020년 10월 5일 )
산에 대하여
- 신경림 -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중략)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은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 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참 아름다운 글이다.
시인의 말대로 그냥 사람 사는 재미를 알만한 산을 골라 동행할 수 있는 친구들과 즐겁게 산행하고 말걸
왜 이렇게 높고 험한 산을 골랐는지 후회 막급이다.
런들 마운틴(Mount Rundle)은 큰 산이다.
캔모어 시내에서부터 밴프 시내까지 캐나다 1번 하이웨이를 따라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하이웨이 쪽에서 보자면 900m가 넘는 수직 절벽에 날카로운 봉우리들로 감히 사람의 범접을 허락할 것 같지 않은 산이다. 그렇다 보니 밴프 지역의 3대 명산( Castle Mt. & Cascade Mt. )이라고 불린다고 여기 오래 산 한국 아줌마한테 들었는데 바른 정보를 전달하고자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공식 기록으로는 확인이 안 된다.
지난여름 동안 체력이 좀 좋아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역시 큰산은 그냥 닥치고 오르는 수밖에 없다. 흙길이 나와도 오르고 바윗길이 나와도 오르고 스크리 지역이 나온다 해도 그냥 오르는 수 밖엔 없다. 그래야 2,948m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 2시간은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준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걸으면 된다.
마운틴 런들의 높이와 그 험한 악명에 비하면 찾는 사람이 많은지 트레일이 비단길이다.
몇 번의 짧은 스위치 백이 끝나면 시야가 터지면서 밴프의 뒷산 썰퍼 마운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정상에 곤돌라 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하고 산 밑에 옴폭하게 자리 잡은 온천탕이 보인다.
한때는 저 탕에 앉아 저기를 올라가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 내가 그 자리에 서있다.
런들 마운틴의 주 봉우리들 사이의 큰 계곡(가이드 글에는 massive central gully로 표시)을 지나자마자 아주 급한 경사를 오르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이 길은 Ribbon 폭포 오른쪽을 오르는 길과 너무나도 똑같다.
산행을 해보니 런들 마운틴은 대체로 네 구간으로 나뉜다.
첫 번째 큰 계곡까지의 어프로치 길, 두 번째 gully부터 수목한계선까지, 세 번째 Dragon's Back이라는 바위 구간, 네 번째가 정상 능선까지의 scree 지대로 구분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산행 후 사진에 기록된 시간을 계산해 보니 첫 구간의 2시간을 제외하고 각 구간별로 꼭 1시간씩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 정상 능선에서 정상까지 10분은 덤이다.
5시간 10분 오르고 3시간 30분 하산해서 총 8시간 40분이 걸렸다. 올해 최장 기록의 산행을 시즌이 끝나는 시점에 한 셈인데 그저 누군가에게 좋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전체적으로 가파른 편이지만 수목한계선까지의 두 번째 구간이 특히 가파르다. 더구나 먼지가 풀풀 나는 마사토 같은 흙길이라 비나 눈이 오면 살인적으로 미끄러울 거라 생각이 든다.
가이드 글에 Dragon's back이라고 설명해 놓은 구간이 있는데 그걸 공룡능선이라고 해석해도 될지 몰라도 우리나라 설악산 공룡 능선과는 전혀 안닮았다.
공룡 능선이라하면 왠지 울뚝불뚝한 지느러미(?) 같은 모습이 연상되어야 하는데 그냥 밋밋한 석회암 바위 표면일 뿐이다.
물론 바윗길 좌우로 낭떠러지 길이고 중간에 아주 좁은 병목 구간도 있는 데다 바위 표면에 자잘한 돌들이 많아 미끄러지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길은 전에 Mt. Lawrence grassi에 갔을 때 본 능선과 아주 닮아 있었다.
Mt. Lawrence가 길이는 짧았지만 병목 구간도 있고 정상으로 이어진 길은 오히려 더 가파르고 낭떨어지로 이어져 있어서 그 당시 쫄보였던(물론 지금도 쫄보지만) 나는 정상 등정을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 정상능선까지는 진짜 최악의 스크리 지역이다. 나보다 늦게 올라와서 나를 앞질러 갔던 젊은 아가씨가 내려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이 돌 길에 신물이 난다(I was sick of these f...n rocks. ㅋㅋ)고 넋두리를 하고 또 다른 일행은 나보고 왼쪽이 더 낫다며 왼쪽으로 올라가라고 조언을 할 정도였다. 그들도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어떤 곳은 작은 바위 위에 발을 디디면 바위 주변 1미터쯤 땅 전체가 천천히 밑으로 흐른다.
그러니 그 다음 발은 그 흐르는 또 다른 돌 위를 딛게 되는데 그러면 그 흐름이 다시 반복되어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가장 짧은 구간이지만 힘과 시간이 가장 많이 든 구간이다.
계절적인 영향인지 정상에서의 바람은 세기 뿐 아니라 온도도 낮아서 무척 추웠다.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이 곱아서 한참을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겨우 사진만 찍고는 급히 되돌아 내려왔다.
참 이상도 하지 어느 산이든 정상에만 가면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다행히 비나 눈은 오지 않았으나 만약에 대비해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정신없이 수목한계선까지 내려와서야 한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간식을 먹으면서 정상을 뒤돌아보니 산은 안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검은 구름은 없어지고 얇은 하얀 구름이 덮였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 지난건지 더 이상 뭉게구름이 안 보인다.
아주 오래전 몇학년 때인지는 몰라도 구름의 형태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난다. 새털구름이니 양떼구름 같은 구름의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 하늘의 구름이 양떼구름 같아 보인다.
이제 나이가 먹어서 하늘의 변화가 눈에 보이는 건지 아니면 이제야 비로서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생긴 건지
세월이 나를 변화시켰다.
저녁 8시가 되니 구름에 허리가 잘린 일그러진 보름달이 뜬다. 구름속에 잠긴 달.
호수에 잠긴 달을 흥얼거리며 구름에 달가듯이 집으로 간다.
호수에 잠긴 달은~~ 당신의 고운 얼굴~~ 다정한 미소 띄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