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t Mountain ( 2020년 8월 3일 )
요즘은 조금 빨라졌지만 한참 여름 해가 길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서야 가로등이 점등된다.
다음날 아침 몇시에 가로등이 소등되는지 모르지만 새벽 4시 반 산에 갈 때는 이미 달은 환한 아침 햇살 속에 잠겨있다.
어제 새벽엔 아직도 짙은 어둠 속에 보름달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싼지브(Sanjiv)가 낮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쏟아낸다.
벌써 해가 짧아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어제 산행으로 올해 꼭 가보고 싶었던 산들은 정상에 갔던 못 갔던 계획했던 산행을 다 마친 셈이다.
거스티픽은 못 갔지만 포트레스는 올라갔고 마운틴 키드는 못 올라갔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처음과 끝 산행에 정상에 가서 더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 길고 힘든 산행이었다.
어제는 동행이 있었다.
같이 택시를 운전 하는 51살의 인도인 친구다. 술을 한잔도 못하는 완벽한 베지테리언이라 술 좋아하고 고기 좋아하는 나랑은 그냥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어쩌다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산에 갔다 오면 가끔씩 산 사진을 보내주곤 했는데 그게 부러웠던지 며칠 전 산에 간다니까 갑자기 따라가겠다고 해서 동행이 되었다.
처음 편안한 숲속 길을 딱 10분 걷고 나서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듣고 오늘 정상에 가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싼지브가 산에 가겠다고 했을 때 계획했던 산행지를 바꾸어야 하나 잠깐 고민을 했다. 싼지브의 체력도 모르는데 따로 선택할 만한 산도 없었다.
Mist Mountain이 높이는 높아도 위험한 산은 아니니까 걷는 만큼 걷다 중간에서 포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온천도 있으니 정상을 못가면 목간이라도 시켜주려고 수영복과 타올을 준비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작년에 답사한다고 갔던 안부까지 가는데 몇번을 쉬고 기다려서 2시간이 걸려 올라갔다.
거기서 포기할 줄 알았는데 빨리 못 걸어서 그렇지 천천히만 걸으면 정상도 갈 수 있겠다고 한다.
산에 오는 동안 차안에서 들은 얘기로는 싼지브는 인도의 Una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자기 고향은 히말라야의 Lower Range에 위치해 있어서 한, 두 시간만 나가면 3-4천 미터의 산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록키에 왔을 때 굉장히 실망을 했다고 한다. 산이 너무 작아서... ㅋ
더구나 아주 오래전이기는 해도 대학생 때는 인도에서 칸첸충카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난다 데비(Nanda Devi) 산의 베이스캠프까지 일주일에 걸쳐 트레킹도 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난다 데비의 베이스캠프 높이가 15,000피트였다고 하니 싼지브는 이미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산에 올라가 본 경험자였다.
그래서 잘하면 정상도 가겠다는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2600m 지점 쯤에 왔을 때 결국 포기한다고 한다.
그동안 벌써 두번이나 20분 넘게 기다렸는데 그게 미안했던지 나보고 혼자 올라가라고 손짓을 한다.
그때가 1시 15분. 아직 시간도 있고 포기하긴 아까워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정상으로 향했다.
바윗길을 지나 코너를 돌아서니 까마득히 선 정상 능선까지가 다 스크리 지역이다. 역시 3100m가 넘는 산이 거저 정상을 내줄리는 없었다.
혹독하게 미끄러운 아주 가파른 스크리 지역이지만 사이사이 큰 돌의 talus 지역이 섞여 있어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큰 돌을 밟아 올라갔다.
밑에서 혼자 기다릴 싼지브를 생각하면 지체할 틈이 없었다.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서둘러 올라갔다.
정상 능선 안부에 도착해서도 사진 몇장만 찍고는 바로 정상으로 향했다.
False summit을 힘겹게 올라서니 정상까지는 짧고 쉬운 능선길이다. 그래도 능선 동쪽은 완전 천 길 낭떠러지라 능선 가로 발길이 가면 섬뜩하고 놀라곤 했다.
3,140m. 여지껏 등반했던 최고 높이의 정상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감정도 없고 오히려 여태껏 갔던 산들보다 사람들도 훨씬 더 많아서 위험하다는 생각도 덜 했다.
3000m 넘는 산을 꼭 가보고 싶다는 친구하고 같이 오자고 약속은 했었지만 너무 가파라서 혼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상에는 어느 등반자의 추념 동판과 등반자 레지스터 통이 놓여있었다. 통을 열어 빈 여백을 찾아 이름을 적어 넣었다.
저 멀리 북서쪽 하늘이 시커멓게 구름이 덮는가 싶더니 금방 세찬 바람과 함께 내쪽으로 몰려온다.
서둘러 셀카봉을 꺼내 사진 몇장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 온 정상 능선을 거쳐 안부로 내려서지 않고 정상에서 바로 떨어지는 급전 직하의 스크리를 택했다.
한국의 스키어들이 자랑 삼아 실버 직벽을 직활강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갈 스키를 타고 직활강을 해서 날듯이 내려왔다. 내려오는 중에 우박이 떨어졌다.
싼지브와 헤어졌던 바윗길에서 다시 싼지브를 만났다. 헤어질 때 가까이 있었으면 차 키라도 주었을 텐데 먼저 내려가지도 못하고 나를 기다린 모양이다.
나 같으면 가까이 있는 노천 온천에라도 갔을 텐데 이 답답한 친구가 살짝 짜증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다.
서둘러 앞장서서 내려오는데 뒤에서 악!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싼지브가 빗길에 바위에서 미끄러져 손가락을 다쳤다.
피가 철철흐르는 손가락을 손수건으로 꾹 잡아 지혈을 시키고 내 장갑을 끼워주었다.
그 이후론 더욱 겁을 먹은 데다 다리에 가래톳이 섰다고 엄살(?)을 피며 한없이 천천히 걷는 바람에 오후 6시가 넘어서야 겨우 차에 도착했다.
내려오는 내내 입이 삐죽 나와서 이번 산행이 내 인생에 마지막 산행이 될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하더니 차에서 좀 쉬고 나니까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나한테 미안해서 그랬는지 말도 많아지고 그래도 좋은 경험 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도 한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어주고 이야기를 해주니 졸리지도 않고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어 좋았다.
오늘 알게된 새로운 지식 하나. 히말라야는 힌디어로 힘(snow)과 알리아(place to go)의 합성어로 눈이 있는 곳이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적합할 거라고 한다.
눈이 있다는 그 곳. 그곳의 눈도 하얀색일까? 그곳에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