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tress ( 2020년 7월 7일 )
어느 날 갑자기 여름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무릎이 성치 않은데 마음은 분주해졌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올해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다.
어떤 친구가 내 무릎 상태를 듣고 의사한테 가기 전에 좀 쉬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서 그 조언을 듣기로 했다.
어차피 날씨도 안좋아 산행이 쉽지도 않을 터였다.
새벽녘 남쪽 하늘에 뜬 보름달 오른쪽 귀퉁이가 이지러진걸 보니 지난번 산행하고 한 달이 넘은 모양이다.
차츰 무릎의 통증도 사라지고 산에 가기로 마음을 먹으니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진열장 앞에 섰을 때처럼
생각이 많아졌다. 한참 고민하다 다른 맛 두 스쿱을 한 컵에 담기로 했다.
체스터 레이크 주차장에는 차가 한대도 없었다. 화요일이고 날씨도 안 좋은데 누가 산에 오겠는가.
오늘도 이 산에는 나 혼자 뿐일게 틀림없다.
40분을 걸어 올라가 자전거 입산 통제 구역에 자전거를 묶어 두고 언덕을 올라서니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분지를
만났다. 여기서 부터 정말 아름답고 편안한 길을 따라 체스터 레이크에 도착했는데 이 길은 본격적인 산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고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체스터 레이크를 떠나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면 분지형태의 넓은 계곡을 만나는데 한여름인 지금도 눈이 많아서
마치 빙하를 트레바스하는 기분으로 단단한 눈 위를 걸어 Fortress와 Gusty Peak 분기점으로 향했다.
분기점에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은 황당함이랄까 마치 막다른 골목 끝에 선 기분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어 보였다.
오늘 이 코스는 3000m 높이의 산 하나를 오르고 540m만 다시 오르면 3000m 높이의 산 두 개를 한 번에 오를 수 있다고 해서 욕심을 내본 코스였다. 하지만 Gusty Peak은 경사도 심한 데다 눈도 많아서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우선 오늘의 메인 이벤트(?)인 The Fortress를 향해 Peak Begger 앱의 GPS를 따라 오른쪽 급사면으로 올라 붙었다.
가운데 가파른 눈사면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Talus 지역이지만 그 끝의 scree 지역이 힘들어 보여 왼쪽의 slab으로
올라 붙었다.
바위에 붙어 올려다 보니 비 오는 날 인수 대슬랩 밑에서 안개에 덮인 인수 정상을 바라볼 때처럼 아득하니 한숨만
나온다. 처음에는 스크리 지역을 타고 오르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올라갈수록 고도감이 높아지면서 다리가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이 산속에서 만에 하나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서 도저히 계속 오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눈 상부지점에서 눈을 트레바스 해서 스크리 지역으로 넘어갔다. 진짜 여기의 스크리 지역은 최악이었다.
150m 높이를 올리는데 꼬박 1시간을 걸려서야 겨우 Chester - Fortress 꼴(Col)에 설 수 있었다.
내려올 때는 이 스크리로해서 Talus로 내려왔는데 미끄러지면서 두 번을 넘어지고 영광의 상처가 생기긴 했지만 올라올 때도 이 길로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꼴에 올라 섰을 때부터 구름이 끼고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피해 바위를 등지고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이때가 벌써 1시 10분이었다.
Col에서부터 정상까지도 큰돌과 잔돌이 섞여있는 끝없는 scree 오르막이다. 이미 꼴에 올라서느라 힘을 많이 소진해서 발걸음이 많이 무거워져 있는대다 안개가 짙어 정상에 올라가도 볼 것도 없을거 같고 날씨가 더 악화되면 내려오는 길도 걱정이 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렇다고 200m만 더 올라가면 3,000m 산의 정상인데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워 안개가 잔뜩 끼어 시야가 거의 없는 산등성을 죽기 살기로 올랐다.
The Fortress. 우리 말로 요새라는 뜻이다. 멀리서 봤을 때도 요새 같아 보이는데 정상에 가까이 왔을 때 어느 순간 불쑥 안갯속에 나타난 정상 바위는 마치 요새의 망루 같았다.
이렇게 외관이 험악하게 생긴 산은 혼자서 등정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 내 능력을 아는 사람이 추천해 주거나 내가 아는 누군가의 등정 소식을 들어야 갈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전에 The Wedge를 갔을 때는 허리를 다쳐 찾아간 물리치료사가 추천해 주어서 갈 수 있었다. 산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만 듣고 그의 능력을 알 수는 없었지만 14살 된 그의 아들이 정상에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 아들보다 체력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담력은 뒤지지 않을 거 같아서 도전하게 되었다.
또 이 Fortress는 윤철이 커플이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윤철이야 내가 따라갈 수
없지만 윤철이의 동반자는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다녀와서 느낀건데 윤철이 동반자가 정상에 올라갔다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산행 능력이
뛰어나고 담력도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윤철이 동반자도 갔고 나도 갔다고 포트리스 등정 욕구가 생겼다면 좀 특별한 각오를 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해 주고 싶다.
아무튼 날씨 탓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 쉽지만은 않은 산행이었다.
Bob Spirko의 가이드 글에도 정상에서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 정상의 파노라마 뷰는 찍지를 못했다고 했는데 나도 정상에서 멋진 뷰는커녕 너무 추워 쫓기듯 내려와야 했다.
내려오면서 다음을 위해서 거스티픽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오늘 같이 눈이 많아서는 올라서면 바로 눈사태로 이어질 것 같아 적어도 눈이 없을 때 등정을 하는 게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욕심껏 두 스쿱을 푸기는 했지만 글쎄... 지금은 나머지 한 스쿱을 그냥 영원히 못 먹을 아이스 크림으로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