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al Ridge Trail (2020년 5월 17일)
할 수 없어서, 정말 어쩔 수 없어서 5일 만에 기권을 했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식당은 물론이고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 마저도 테이크아웃만 된다.
모든 국립, 주립 공원도 문을 닫았다. 동네 어린이 놀이터마저도 테이프로 둘러쳐져서 이용이 금지되었다.
일을 계속할 수는 있지만 남들이 쉬라고 할 땐 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지난달 월요일부터 놀기 시작했다.
기왕 노는 길에 집안 정리도 하고 냉장고에 오래된 음식들도 정리를 하기로 맘을 먹었다.
생각대로 냉장고는 홀쭉해지기 시작했지만 반비례해서 내 배는 점점 더 불룩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5일을 놀고먹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자전거를 샀다.
진짜 왠만해서는 좋아하는 산에나 다니고 말려고 했는데 산에도 못 가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전거는 중학교때 이후로 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탄다라는 의미만으로는 자전거가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타보니 그것도 기술이 필요하고 실력이 따로 있었다.
매일 오전 오후로 두 번씩 탔다. 점차 위험한 지역도 가고 넘어지기도 숱하게 넘어졌다.
차차 익숙해지면서 록키에서도 타보고 싶어 졌다.
그러던 중 일을 쉰 지 4주되던 주에 국립공원이 문을 열었고 지인 둘이 산에 갔다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기 시작하고 꼭 한달때 되는 일요일 자전거를 싣고 무작정 산으로 향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눈이 엄청 내렸다.
산 근처도 가보지 못하고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어제... 날이 썩 좋지는 않아도 우선 눈, 비 소식이 없으니까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처음에 자전거 타기와 산행을 같이 할 수 있는 산을 생각했을 때 떠오른 곳은 Mt. Shark와 Mt. Lawrence Grassi 그리고
Coral Ridge였다.
Mt. Shark은 3000m 가까운 산이라 쉽게 결정해서 갈 수 있는 산은 아닌 거 같고 Mt. Lawrence Glassi는 한번 가본 산인데 정상부가 날카로운 릿지라 아직은 시즌이 아닌 거 같고 그래서 2000m 초반의 아주 쉬운 Coral Ridge로 결정을 했던 터다.
구름이 잔뜩 낀 일요일 아침 Abraham Lake를 향해 록키마운틴 하우스(지명)로 길을 잡았다.
맨날 노는 백수가 굳이 일요일로 산행 날짜를 잡은 이유는 그래도 좀 덜 백수 같아 보이기 위해서고 사람들이 없으면 더 무섭기(?) 때문이다. ㅋㅋㅋ
Coral Ridge는 전에 한번 시도했다가 길을 잘 못 들어 실패한 곳이라 산행 초입을 찾아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David Tompson 하이웨이에는 나들이 나온 차들이 많았다. 그런데 록키로 향하면서 보니 두 군데의 Day-use Lodge가 차단물로 막혀 있었다. 그 외의 강가 조그만 주차 공간에는 일반 차들이나 RV들이 자유롭게 주차되어 있었는데 내 생각에 Day-use Lodge에 사람들이 몰리는 걸 막으려는 의도 같아 보였다.
Coral Ridge Trail 주차장에는 차 두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너무 많지도 않고 딱 좋았다.
자전거를 내리고 산행 준비를 하고 있는데 네 번째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차에서 아가씨 둘이 내렸는데 눈여겨볼 틈도 없이 주차한 지 10초 만에 벌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진짜 그렇게 빨리 산행 시작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듯싶었다. 속으로 준비 운동도 없이 저렇게 바로 산행을 하다니 끌끌 혀를 차면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코랄 릿지 트레일 처음 약 4km는 그다지 높낮이가 많지 않은 널찍한 트레일이라 자전거 타기에 좋았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며 끌며 코랄 릿지와 코랄 크릭 트레일이 갈라지는 곳까지 와서 트레일 옆 나무 숲에 자전거를 숨겼다. 십분 쯤 더 걸으니 전망이 탁 트인 고개 마루에 도착했는데 거기에 산등성 쪽으로 리본이 달린 걸 봐서는 이제 트레일을 버리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고개 마루에서 물을 마시고 귤을 까먹고 있는데 아까 중간에 지나친 아가씨 둘이 도착을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다른 일행과 섞이는 게 싫어서 서둘러 산행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 부분이 굉장히 가파르다. 여기서 Ledge라 부르는 바위층인데 아가씨들하고 거리를 두려고 좀 무리를 해서 호흡이 턱에 차도록 올라갔다. 그 후 두 번째 바위층(Ledge)과 세 번째 바위층에 올라설 때까지는 그런대로 길이 좋았다. 그런데 점점 눈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세 번째 바위층 끝에서 산등성으로 올라 붙는 길은 처음 고갯마루에서 산등성으로 올라 붙던 길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바윗길은 아니고 아주 가파른 언덕일 뿐이다. 그때가 12시 가까운 시간이었고 내 고도계로 1850m 대여서 12시 30분쯤 어느 능선이던 올라서면 거기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웬걸 경사가 급해서 오르는 속도도 더디고 점점 눈이 많아져서 이젠 어떻게 올라가야 하나 고민을 해야 할 판이다.
오늘은 자전거도 타야 해서 운동화 스타일의 트래킹화를 신어서 얕은 눈만 지나가도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간다. 처음엔 그때그때 눈을 털었는데 나중엔 지쳐서 그것도 힘든 일이 되었다. 가능한 눈이 적은 소나무 밑동을 타고 오르다 보니 이번엔 소나무 잔가지와 뾰족한 솔잎이 목을 통해 잔등으로 들어와 목과 등이 따끔거린다. 12시 반이 지나면서 1시 넘겨서 점심을 먹지는 말아야지 했는데 1시가 됐을 때 나는 눈 밭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미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에서 헤매다 보니 신발과 장갑은 다 젖어서 손발이 시린데 그 상태로 점심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제 얼마가 됐건 마저 다 올라가던가 여기서 포기하던가 였다. 그런데 내가 잘 못된 길을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정상 능선에 올라서면 내려갈 때는 이런 눈밭이 아닌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들면서 그냥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시 20분쯤 정상 능선에 섰다. 생각대로 정상 능선에는 눈이 없었다. 더구나 바람도 없고 따뜻한 햇살도 비친다. 정상으로 걸어가면서 얼었던 손과 발이 풀렸다.
1시 30분 케른이 있는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나침반을 보니 David Tompson 하이웨이 서쪽에 있는 산을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돌아서 올라온 것이었다. 올라와 보니 산 남동쪽은 완전 낭떠러지라 도저히 올라오는 길은 없어 보이고 결국 내려갈 때도 올라온 눈밭을 헤치고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사진을 몇 컷 찍고 김밥을 먹으면서 저 멀리 아브라함 레이크 쪽 경치를 즐기며 천상천하 유아독조...온을 일갈할 찰나에 여자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아까 준비운동도 없이 산행을 시작한 그 아가씨들이 저 밑 정상 능선에 올라서서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헐... 난 벌써 저 밑에서 포기한 줄 알았더니 이런 얕은 산은 준비운동도 없이 오르는 프로들이었던 모양이었다. ㅋ..
방을 빼줘야 할 거 같아 서둘러 김밥을 먹고 그 아가씨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그 아가씨들도 눈길에 고생했던지 바지랑 신발이 다 젖었다. 이제 정상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마저 올라가라고 했더니 한 아가씨는 여기면 만족한다고 하고 한 아가씨는 당근 갈 거라고 동시에 대답하고는 또 좋다고 깔깔거린다.
그 둘을 버려두고 올라 온 곳보다 조금 더 능선 남쪽 끝까지 가 보았다. 올라올 때는 너무 정상쪽으로 직진을 해서 올라와 경사가 더 급했던 거였다. 대신 남동쪽으로 비스듬하게 산등성을 탔으면 경사도가 적게 여기 능선 남쪽 끝으로 올라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눈이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눈밭을 옆으로 타야 하니 눈 속에 있는 시간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발을 졸라매서 발가락은 괜찮은데 발 뒤꿈치로 눈이 들어가 뒤꿈치가 감각이 없어서 얼얼하도록 눈밭을 헤치고 내려왔다.
올라올 때 자전거 때문에 조금 더 고생을 했지만 내려오는 길은 자전거 덕분에 15분 만에 날듯이 내려올 수 있었다.
바로 이 맛에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자전거 타는 근육과 걷는 근육은 다른가 보다. 아무리 한동안 산에 안 갔다 해도 그동안 자전거를 열심히 타서 나름 다리에 근육이 붙었다고 생각되었는데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다.
2063m. 낮은 산이라 우습게 여겼는데 쉬운 산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 록키에는 쉬운 산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