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edge
일요일
어떤 친구가 말하길, 가끔은 몇십 년을 같이 살아온 와이프를 좋아해서 같이 사는 건지 살아온 관성으로 살아가는 건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고 한다.
나야 그런 고민 할 이유는 없고 대신에 요즘 가끔은 내가 진짜 산이 좋아 산에 가는건지 그냥 몇십 년 산에 다닌 관성으로 산에 가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밉건 곱건 현재 와이프랑 잘 살아 보려면 적어도 외도는 안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듯 나도 산에 가는데 나름 각오와 원칙도 있다.
아무리 꼬셔도 낚시는 안한다. 재밌을 거 같은 바이크도 안 한다. 그러고 보면 적어도 산으로부터 쫓겨나지는 않겠다는 각오가 보인다.
원칙도 있다. 우선 아무리 멋있고 이쁜 산이라도 내 능력을 벗어나는 산은 도전하지 않는다. 와이프랑 살면서 이쁜 여자한테 잘 못 눈 돌렸다가 한방에 가는 것처럼 내 능력은 생각지도 않고 이쁜 산이 꼬신다고 덥석 산에 갔다가 한방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한번 갔던 산은 가급적 두번 다시 안 간다는 거다. 록키엔 워낙에 산이 많으니까 한 번씩 가도 죽기 전에 몇 개의 산이나 가보겠는가.
2011년 6월27일 에드먼턴으로 왔으니까 록키에 발 들인 지 이제
만 7년이 된 셈이다. 그동안은 나름 지조와 원칙을 잘 지켜오고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나와의 약속을 깰 산행이 잡혀있었다. 나로선 두 번째 가는 산행이었었는데 다행이랄까 날씨가 안 좋아 산행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 주가 롱위켄드라 그냥 집에서 보내긴 아깝고 혼자서라도 산행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날씨도 안좋은데 하필 혼자 가겠다면서 고른 산이 어쩌면 내 능력을 넘어설 만큼 좀 험한 산을 골랐다. 전에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보던 아주 이쁜 산이다.(흠... 말이 좀 다르네. ㅋ)
서둘러 일을 끝내고 대충 산에 갈 준비를 해서 오후 6시 30분 록키로 출발했다. 록키 입구에서 기름만 가득 채우고 날듯이 산 입구인 웻지 판드(Wedge pond) 주차장에 도착했다. 밤 10시 10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주차장 입구에 몇개의 금지 표지판이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Day use only parking이란다. 오늘 여기다 파킹하고 차에서 잘 생각이었는데 난감하게 되었다. 우선 11시까지는 사용 가능하다니까 얼른 칠리 깡통 하나를 따서 늦은 저녁을 대신하였다. 공원 패트롤이 올 경우에 대비해서 여행 중 피곤해서 잠시 쉬었다고 둘러댈 요량으로 일부러 차를 파킹장 입구에 주차를 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12시까지 기다려 보고 괜찮으면 그냥 자려고 인터넷으로 내일 코스를 다시 검색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10분 전 12시에 패트롤이 왔다. 부리나케 일어나 준비된 변명을 하고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마운틴 키드 RV 파킹장으로 차를 몰았다. 만약에 돈 내라면 내고 감시자 없으면 아무 구석에나 숨어서 잘 생각이었다. 파킹장 한 구석에 차를 숨기고(?) 차 뒤에 누웠다. 차 뒷문 유리가 바로 눈 앞이라 전면이 다 하늘이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 하늘에 별이 없지만 언젠간 별 볼 일도 있겠지 싶다. 그때는 꼭 별 좋아하는 누군가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든다.
월요일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5시 40분. 새로 산 우모 슬리핑 백이 제 구실을 잘했는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 침낭 밖으로 나오니 춥다. 8도.
비가 긋기를 기다리며 웻지 판드 주차장으로 다시 이동했다. 주차장 왼편이 동쪽인지 왼쪽 하늘부터 밝아 오면서 비가 가늘어지다가 금방 그쳤다.
아침으로 일본식 인스턴트 우동을 끓여 먹으려고 희철이 형님이 사준 버너(희섭아~ 네가 준 버너는 우리 아들 줬다. 그거 받고 우리 아들 입이 귀에 걸렸어 ㅋ)에 물을 올려놓고 The Wedge를 올려다보니 먹구름을 배경으로 손에 잡힐 듯 아주 가깝게 우뚝 서있다. 쐐기를 뒤집어 세워 놓은 듯한 모습이라 Wedge라 이름 붙여졌지 싶다. 가까이서 보니 정상부 바위구간이 생각보다 더 가파르게 보인다. 어려서 비 오는 날 대슬랩 밑에서 인수를 올려다보던 생각이 난다. 긴장감, 두려움 뭐 그런 감정들.
2,669m. 현재 높이는 내 시계의 고도계로 1,567m.
오늘 1,100m를 올라가야 한다. 더구나 정상 200m 구간은 바윗길이다. 짐을 되도록 가볍게 꾸렸다. 식량으로는 육포 한 봉지, 망고와 파인애플 말린 거 조금, 초콜릿바 3개, 국산 롯데 카스타드 케이크 4개, 귤 2개 그리고 생수 작은 거 3통. 거기에 얇은 패딩 하나 윈드재킷. 그걸로 오늘을 버텨야 한다.
참 곰 스프레이는 필수.
8시 30분 산행을 시작했다. Unofficial trail이라 표지판은 없지만 산길 초입은 쉽게 찾을 수 있는 편이었다. 숲으로 들어서면 곧 자작나무 숲으로 이어지고 한 10분 걸으면 마른 계곡(creek)을 만나고 10분을 더 걸으니 제법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만나는데 갑자기 경사가 심해진다. 가이드 책자에 나오는 대로 크릭 왼쪽으로만 따라가면 되고 길은 아주 선명하다.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지붕에 기대 놓은 사다리 같다고 하면 비유가 될라나. 도로 가까이 있는 산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다.
어느 등산 책자에 마운틴 알란이 능선 오르는 경사도가 제일 급하다고 했는데 내 경험으로는 알란 마운틴의 끝봉 올림포스 픽 보다 경사가 더 심하단 생각이다. 몹시 힘들지만 그 덕에 고도를 쉽게 까먹는다.
Bob Spirko가 이 웻지 산행을 phase 3로 나누었는데 산행을 해보니 아주 적절한 구분이었다.
Phase 1은 산행 초입부터 능선까지 phase 2는 능선부터 바위 밑에 scree 지역까지 나머지는 정상부 바위 구간.
1시간 반 만에 500m를 올렸는데 전망이 트인 능선에 올라섰다. 지금 올라가는 길 바로 맞은편에 마운틴 키드(Mountain Kidd)가 3000m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고산답게 정상부는 구름에 덮여있다. 구름과 가스가 가득 껴서 발아래로 웻지 판드만 겨우 보인다.
능선에 올라서 조금 걷는데 갑자기 싸라기 눈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고도를 높일수록 눈이 더 많이 내린다. 다시 한 시간쯤 걸어서 바위 밑 스크리 지역에 도착했다. 2,502m. 스크리 지역에 올라서니 흙 길이 아니고 바윗길이라 눈이 덮혀서 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머리 위로는 까마득한 바윗길인데 암벽등반이 아닌 일반 등산로라고 하긴 아닌거 같고 바위와 스크리 지역의 경계를 따라 트레바스하는 형태로 건너가 보기로 한다.
능선에서 벗어나 스크리 지역으로 들어서니 왼쪽 산아래 쪽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한번 미끄러지면 10분 만에 하산 완료 할거 같다. 삼분의 이쯤 건넜을까? 만년설로 보이는 눈 더미가 앞을 막는다. 오른쪽은 바위요 왼쪽은 까마득한 급경사의 내리막이다. 달리 길이 없어 보이니 건너긴 해야 할 텐데 눈 위에 올라서 스텝을 만들려고 했더니 딱딱하고 미끄럽다. 건너편까지 10m가 채 안 되겠지만 잘 못 미끄러졌다간 뼈도 못 추릴 것만 같다.
아직도 눈은 많이 내리고 있다. 7월에 눈이라니... 하긴 이것이 록키의 날씨다. 여기까지 올라온 게 너무 아깝고 억울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한다.
하산 길. 경사가 급한 내리막 길은 내린 눈으로 또 녹은 눈으로 살인적으로 미끄럽다. 게걸음으로 걸어도 몇 번을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길가의 나무 가지에 쌓여던 눈이 녹으면서 바지를 다 적셔서 속옷까지 젖었다. 바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신발이 방수됨을 증명한다. 환식이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
하필 날을 골라도 이런 날을 골랐을까 후회가 된다. 산을 좋아해서 오는 건지 날씨에 상관없이 관성으로 오는 건지...
또 원칙을 깨야 할 일이 생겼다. 한번 온 산은 안 간다 했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로 하자. 언젠가 다음에... 올해 9월이 될지 내년이 될지. 맞다. 내년 9월에 산우랑 오면 더 좋겠다. 아! 근데 형남이가 안 온다 하겠는데 어쩌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