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Allan (2016년 6월 19일)
한국엔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한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역사에 남을 산불이 났던 여기는 요즘엔 연일 비다. 그렇다고 많이 오는 것도 아니다.
매일 한 두 차례, 딱 차 지저분 해질 만큼 오곤 끝이다. 장마도 없는 이곳에 이렇게 매일 비가 왔었던 적이 있던가?
비정상회담의 전현무 표현을 빌리면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날씨'가 틀림없다.
마지막 산행 때 구름과 안개와 빗속을 해맸던 기억 때문인지 쉽게 산행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록키가 보고 싶어 졌다. 그새 빗속에 고생한 기억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망각은 좋은가 보다.
원래는 'Hero Knob'을 갈 예정이었다. 정상이 2524m고 왕복 8.6km로 비교적 쉬운데라고 생각해 산행지로 택했었다.
그러나 unofficial 코스. 수지여사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렸다. 날씨가 안 좋아 반드시 official 루트여야 된다는 거다.
마지막 두번을 Unofficial 코스로 가서 두 번 다 생고생을 시켰으니 할 말이 없다.
록키로 가면서 레드디어 팀호튼에서 아침을 먹고 운전대를 수지여사한테 맡기고 Trail 책자를 펼쳐 들었다.
완전 시험 보기 직전 쉬는 시간에 벼락치기하는 느낌이다. 언뜻 카나나스키스 빌리지 근처 산행 코스가 생각난다.
리본 크릭도 괜찮고 마운틴 알란도 괜찮은데 둘다 코스가 긴 편이다. 마운틴 알란은 특히나 코스가 길고 쉽지 않다는 소문을 들어서 아직 도전을 못한 곳이다. 그래도 한번 가봤던 리본 크릭을 또 가기엔 그렇고 릿지 끝 봉우리인 Olympic Summit까지만이라도 가기로 하고 Mt. Allan으로 방향을 잡는다.
책꽂이에 책을 세울 때 중간에서 책이 끝나면 맨 마지막에 아주 크고 두꺼운 책을 고여 놓거나 책 스탠드를 받혀 놓는데 그 스탠드를 여기서 bookending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트레일 책자를 보니 길게 뻗어 내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도 bookending peak이라는 표현을 해 놓았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오늘 우리가 가는 Centennial Ridge는 북쪽 끝 Mt. Allan을 최고봉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리는데 그 마지막에 Olympic Summit이 받치고 있다. 용두사미 식으로 끝나는 다른 릿지와는 다르게 summit 칭호를 받을 만큼 확실하게 솟아 오른 bookending 봉우리이다. 책자에 최고봉 Mt. Allan의 높이는 2819m, 정상까지는 왕복 15.6km, 표고차 1356m라고 한다. 숫자만으로도 쉽지 않은 산행이다.
아주 익숙한 리본크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Hidden Trail로 들어서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경고문이 보인다. 4월 1일부터 6월 21일까지는 큰 뿔 양(Bighorn Sheep)의 출산기라 이 시기는 양들이 사람한테 매우 민감해서 코스를 닫는다고 한다. 오늘이 6월 19일. 오픈 이틀전이다. 아주 잠깐 고민을 하고 그대로 산행을 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경고문 끝에 '협조에 감사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만약에 절대 산행 불가라면 협조 대신 벌금이 얼마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Centennial Ridge Trail로 연결되는 Hidden Trail 입구. 주차장 입구 오른쪽에 안내판과 함께 있어 찾기 쉽다.)
(왼쪽에 새로 생긴 크로스컨트리 스키 트레일 때문에 길을 헷갈렸다. 하필 그곳에도 임시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 이곳에서 수지여사 등 뒷길로 약 100m를 올라 좌회전하면 Centennial Ridge Trail로 바로 연결이 되고 이후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히든 트레일은 옛날 석탄 광산에서 이용하던 산판길을 크로스 컨트리 스키 트레일로 만든 길이다. 그래서 길이 아주 좋다. 사실 Mt.Allan은 나키스카(Nakiska) 스키장의 배경산으로 알려진 산이다. 그런데 오늘 와 보니 센테니얼 리지의 북사면이 스키장의 슬로프인 셈이다.
캐나다 록키의 official 루트란 signpost와 cairn과 붉은 페인트로 바위에 칠을 해 루트를 표시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표지판(signpost)도 우리나라처럼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는게 아니라서 처음 가는 사람은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책자에는 세 번째 표지판까지 계속 좌회전하라고 했는데 어디선가 길을 잘 못 찾아들었다. 다행이 나처럼 멍청한 사람들이 또 있었는지 희미한 발자취를 찾아본 트레일로 쉽게 합류할 수는 있었다.
(이곳이 Centennial Ridge Trail 시작점이고 마지막 수목한계선 숲 밴드가 있는 곳이다. 이 숲 끝나는 지점에 자작나무 숲이 있었는데 이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자작나무 숲은 처음 본다.)
(위 두 사진이 Official 루트 임을 증명하는 표식판)
책자에 의하면 처음 2km 구간에 610m 높이를 올린다고 했는데 본격적인 센테니얼 릿지 등산로에 오르니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전형적인 switch back의 갈지자 코스의 롤 모델이라도 되는 듯싶다. 산행을 끝내고 집에 와서 Olympic Summit의 높이를 찾아보았는데 어디에서도 그 높이를 알 수 없었다. Olympic Summit에 올라 정상을 봤을 때 적어도 2600-2700m는 되리라고 짐작을 해본다.
록키로 오는 동안 오락가락하던 비가 산행 출발할 때는 다행히 그쳐 있었고 산행 중에도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지만 릿지에 오르니 바람이 무지하게 세게 불고 기온도 아주 찹다. 서둘러 예비로 준비해 간 얇은 파카를 입고 바람막이 자켓도 입었는데도 춥다.
(우리가 올라온 능선길을 뒤돌아본 사진이다.)
(사진으로는 경사도를 느낄 수 없지만 길게 뻗어 내린 갈지 자 코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Olympic Summit에 올랐을 때가 12시 45분. 9시 40분에 산행 시작했으니 약 3시간이 걸린 셈인데 경사도에 비해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정상 조금 아래에서 점심을 먹는다. 바람이 몹시 부는 데다 추워서 수지여사가 준비한 김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모를 지경이다. 밥을 먹는 곳에서 Mt.Allan의 정상이 바로 코 앞에 빤히 보인다. 표고차 100m 내외에 편도 2-3km로 약 2시간이면 왕복이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바람이 너무 심하고 기후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Mt.Allan 정상에 가는 건 포기하기로 한다.
(오른쪽 삼각형의 산이 Mt. Allan의 정상이고 왼쪽에 Mt. Laugheed 정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
(Olympic Summit에서 바라본 Mt. Allan으로의 능선길. 왼쪽에 Mt. Laugheed의 웅장한 모습이 보기 좋다.)
대신 책자에서 보았던 Mine Scar라고 불리는 커다랗고 멋진 바위를 찾아보기로 하고 바위 군락이 보이는 Mushroom Garden이라 불리는 스키장 반대편 남사면으로 내려섰는데 여기서 작은 사단이 벌어진다. 어떡하다 바위로 된 작은 릿지를 사이에 두고 수지 여사와 내가 갈라 섰는데 바람이 심한 데다 자켓의 후드까지 뒤집어써서 서로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길이 엇갈려 한 사람은 올라가고 한사람은 내려가기를 반복하면서 서로를 찾느라고 1시간 가까이 시간을 소모하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로가 있었는데도 바위에 반향 된 소리가 바람에 흩어져 마치 바위 밑 낭떠러지에서 들리는 소리로 들려 수지한테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일종의 반데룽 현상이었는데 수지가 머리를 써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가서 나를 기다려 무사히 재회할 수 있었다. 결국 이상한 높은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책자에 나온 사진을 보니 엉뚱한 곳에서 헤맸던 셈이었다. 바위의 위치도 능선에 오르기 훨씬 전이다. 이런 게 시험 보기 직전 벼락치기로 공부한 폐해인 셈이다. 이것이 그거 같고 긴가민가한... ㅎㅎ..
(바위 군락의 주인인 Marmot이 침입자인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Mine Scar로 착각한 바위. 한 핏치짜리 볼더링 암벽등반이 가능해 보인다.)
(Olympic Summit에서 바라보이는 Mt.Allan(왼쪽)과 오른쪽에 Mt.Collembola 정상)
다시 Olympic Summit에 올라섰을 때가 3시 5분. 점심을 먹고 약 2시간을 헤맨 셈인데 그럴 바엔 정상에 갈걸 하는 후회를 해본다. 언제나 내려올 때는 '우리가 어떻게 여길 올라갔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 길이 가파를수록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번 산행도 그런 코스이다. 그래도 능선에 핀 수많은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눈도 마음도 즐겁게 해 피로를 씻어준다. 또 올라갈 때는 못 봤던 큰 뿔 양들도 바위 위에 나와서 우리를 배웅해 준다. 하산 완료 시간 5시 20분. 예상 시간보다 조금 늦었지만 경치도 좋고 아주 좋은 산행이었다.
특히나 수지여사가 험한 산이 아니었어서였는지 아주 만족하는 눈치이다. 이번엔 모처럼 원망은 면한 셈이다.
(Mt.Kidd 와 Ribbon Peak 사이의 Ribbon Creek이 명확하게 보인다. 리본 크릭은 Ribbon Fall까지 편도 약 9.3km이다)
(나키스카 스키장의 리프트가 Centinnial Ridge 거의 9부 능선까지 올라와 있다)
(평면처럼 보이지만 나키스카 스키장의 스키 슬로프이다)